오후 5시. 해음의 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해음아. 아직 화 안 풀렸어? 엄마가 그동안 우리 딸 마음도 몰라주고 미안해. 오늘 회사 앞으로 데리러 갈게. 이따 비 많이 온다는데 우산 안 챙겨갔더라.
해음은 가만히 화면을 응시하다가 폰을 뒤집고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쏴아아 아-”
조금씩 내려오던 빗줄기가 갑자기 하늘이 무너질 듯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해음은 두 손을 키보드에 올려둔 채 잠시 망설이다, 이내 폰을 켜고 문자를 써 내려갔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지 마. 그냥 집에 있어.
폭우 속에 자신을 마중 나올 엄마가 걱정됐던 해음은 괜히 날이 선 말투로 엄마의 문자에 답했다.
30분 뒤. 조용하던 해음의 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엄마 곧 도착해. 1층에서 기다릴게.
‘아 진짜… 오지 말라니까.’
해음이 맘속으로 투덜거리던 그 순간, 창문 밖에서 ‘끼익’하는 크나큰 소음과 함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 났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잘 안 보였나 봐.”
“치인 사람만 안타깝지 뭐.”
직원 몇 명이 밖을 내려다보며 입을 떼었다. 해음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며 남은 업무에 정신을 집중했다.
퇴근 시간이 5분이 채 남지 않았을 무렵, 해음의 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우리 엄마
‘곧 있으면 만날 텐데.’
해음이 직원들의 눈치를 살핀 후 사무실을 빠져나가며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조금만 기다…”
“여기 서울중앙병원입니다. 혹시 이 휴대폰 주인 따님분 되시나요?”
극도의 불안감이 해음의 등줄기를 타고 싸늘하게 흘러내렸다.
“네, 맞아요. 그런데 무슨 일로…?”
“지금 환자분께서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셔서 바로 병원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생명이 위독하세요.”
“…….”
“여보세요? 따님분?”
해음은 갑작스러운 엄마의 사고 소식에 한없이 정신이 아득해지고 무감각해졌다. 돌연히 온몸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무너져가던 마음이 추락해 조각나고, 여러 갈래로 산산이 흩어졌다.
이후, 해음은 자신이 어떻게 병원까지 가게 되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2023년 지금까지도. 단지, 또렷이 떠오르는 건 하얀 천 아래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자신을 기다리던 엄마의 모습뿐이었다.
“널 만난 어제가 엄마 첫 기일이 지나고 딱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어. 만약 그때 내가 우산만 잘 챙겼으면, 그렇게 집을 나가지 않았으면…아니, 그냥 평소처럼 아무 일 없듯 행동했으면, 지금쯤 우리 엄만 이 미래 속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해음은 반복되는 그날의 기억 속에서 끝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그때의 자신을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차가운 망망대해 속에 가두면서. 이러한 고립은 기나긴 자책이 빚어낸 해음만의 속죄 방식이었다. 때론 해음을 살리기도, 때론 해음을 죽이기도 하는.
다소 긴 시간 해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던 초록은, 해음의 어머니와 처음 마주했던 봄날의 에피소드를 해음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나직이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부디 자신의 진심이 해음에게 닿길 바라며.
“그렇게 널 아꼈던 분이 그날 일로 널 원망할 리 없잖아. 단지 너희 어머닌 마지막 그 순간까지 널 걱정하셨을 거야. 그러니까 해음아.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해 줘. 누구보다 널 사랑했던 어머니가 편히 눈 감을 수 있도록.”
그토록 찾아 헤맸던 위로에 꾹꾹 눌러왔던 해음의 눈물샘이 이윽고 밖으로 터져 나왔다.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던 죄책감의 응어리가 따스한 물줄기를 만나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상실의 순간은 찾아와. 난 해음이 네가 그 순간을 제대로 마주 보고 충분히 슬퍼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후엔 그 기억과 감정을 너의 마음 한편에 고스란히 잘 간직해 두었다가, 그리움이 차고 넘쳐서 진심으로 애도가 필요한 순간에 조심스레 꺼내어 봤으면 해. 너도 너의 어머니도 슬프지만 행복하게 서로를 추억할 수 있게.”
해음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 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초록은 혼자서 모든 감정을 삼켜온 해음의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마치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전부 토해내도 괜찮다는 듯이.
그동안 죄책감에 가로막혀있던 강한 그리움이 이제야 울음과 함께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엄마를 향한 해음의 애도가 비로소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