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30분경. 해음과 초록은 해송마을의 산속 집을 향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 맞아…나 생각났어! 그 한옥, 귀신 나온다고 소문났던 집이었어!”
해음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며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믿었어?”
초록이 입꼬리를 올리며 해음에게 물었다. 해음은 고개를 한 번 가로저은 뒤 초록의 말에 답했다.
“아니. 우리 엄마가 그 집 사는 아이랑 잠깐 이야길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집엔 자기 혼자뿐이고 귀신 따윈 없다고 했대. 멍청한 인간들이 괜히 지레 겁먹어선…잠깐만, 설마 그 아이가…….”
“박란이겠지.”
“와…어떻게 이런 우연이……. 엄마가 한 번씩 걱정했었어. 여자아이 혼자 산속에서 산다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꾸 뒤에서 수군거려서 안쓰러워했었는데……. 참 신기하다,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우연이 아니라 인연인가?”
“나도 그래, 해음아.”
“응? 뭐가?”
초록이 나직이 해음의 해맑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옅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해음은 초록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곧 웃음기를 거두고 두 손을 살펴보았다.
“어?”
“왜 그래?”
“없어졌어. 산신한테 줄 뇌물이.”
“약과 말하는 거야?”
“응. 산신이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라고 해서, 일부러 서울 유명한 곳에서 사 온 건데……. 아까 편의점 들리면서 두고 왔나 봐.”
“여기 있어. 내가 다녀올게.”
“아니야. 내가 갈게.”
“해음이 너 피곤하잖아. 어제부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금방 갔다 올게.”
“초록…!”
해음이 말을 꺼내려던 찰나 초록이 뒷모습을 보이며 빠르게 뛰어나갔다. 해음은 어느새 우두커니 홀로 남겨져 있었다.
그때, 폐교 앞에서 보았던 하얀색 진돗개 한 마리가 해음이 있는 방향으로 힘없이 다가왔다.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진돗개가 지닌 상처들이 해음의 두 눈동자에 선명히 들어왔다. 두 눈 속에 담기는 절망스러운 모습에 해음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잠시 얼어붙었다 녹아내렸다. 해음의 두 귀에선 어디선가 또 다른 하나의 별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해음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서서히 진돗개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진돗개는 낯선 해음을 경계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헤치려는 게 아니야.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해음이 무릎을 굽히며 진돗개와 시선을 맞추었다. 진돗개는 까만 두 눈동자로 해음을 가만히 응시했다.
“안녕?”
해음은 살며시 주먹을 쥔 다음 조심스레 앞으로 내밀었다. 진돗개는 잠시 주춤하더니 곧 해음의 곁으로 다가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마주한 진돗개의 상처는 생각보다 더 깊었고, 저마다 다른 모양들로 뒤섞여 있었다. 피 흐르는 상처, 말라붙은 피딱지, 아물고 있는 흉터……. 누군가 오랜 시간 학대해 온 흔적임이 분명했다.
해음의 내면은 점차 붉은빛 분노와 푸른빛 슬픔이 섞인 채 물들어갔다. 해음은 차오르는 감정을 온전히 견디지 못하고 떨리는 손길로 진돗개를 쓰다듬었다. 시각으로만 전해진 앙상함이 손끝의 촉감을 통해 또렷이 전달되었다. 찬찬히 진돗개의 몸을 살펴보자 깡마른 신체에 비해 배가 다소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새끼를 배고 있는 것 같았다.
“너만 괜찮다면, 언니랑 같이 가지 않을래?”
해음의 나긋한 음성에 진돗개는 그저 낑 소리만 내며 해음의 눈을 바라보았다. 인간에 대한 기대도, 세상에 대한 희망도 꺼진 듯한 공허한 눈빛이었다. 계속된 무력감 속에서 어떠한 반응도, 판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해음아-!”
저 멀리서 초록이 진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해음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진돗개는 초록의 모습을 발견하곤 귀를 쫑긋 세우며 흠칫 몸을 떨었다. 이어 곧장 산길 쪽으로 도망쳤다. 해음은 그 뒷모습을 놓칠세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진돗개가 작은 점이 되었을 쯤 해음은 홀로 생각했다.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버틸 수 있을까.
“무슨 일 있었어?”
초록이 한 손에 약과가 든 종이가방을 들고서 해음의 옆에 다가섰다.
“누군가 저 진돗개를 계속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아. 아마 같이 사는 사람일 가능성이 커 보여. 상처도 심하고 새끼까지 임신한 상태라 빨리 구해줘야 해. 저대로 두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그럼 우선 진돗개가 사는 곳부터 알아보자.”
“응…그런데 어떻게 알아내지? 바로 뒤따라가지 않는 이상 찾아내기 힘들 것 같은데…….”
“나만 믿어.”
“어?”
“내가 전에 말했잖아. 식물들이랑 이야기할 수 있다고. 나무들에게 물어서 찾아가면 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다행이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해음이 마침내 안도의 미소를 띠어 보였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다시 찾아보자.”
“응. 고마워, 초록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야.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잖아. 그러니 어떠한 생명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다면 손 내밀어 주는 게 당연한 거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가는 초록의 모습에 해음이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음꽃을 피워 보였다. 초록 또한 해음을 따라 환히 미소 지었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해음과 초록은 같은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별이 되어 마침내 하나의 큰 빛으로 이어졌다.
“가자, 해음아.”
“응, 초록아.”
해음과 초록이 걸음을 떼는 순간 가을을 알리는 밤바람이 나긋이 불어와 둘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둘은 길었던 하루 끝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나란히 산속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