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미래(2)

by 지수

2023년 8월 29일 오전 9시경. 해음이 산신의 방에서 혼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재빨리 이불을 정리한 해음은 초록이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초록아. 일어났어?”

방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해음은 조심스레 초록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문틈 사이로 산뜻한 우디향이 새어 나왔다. 초록은 이불을 덮지 않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해음은 초록이 깨지 않도록 사뿐히 다가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기처럼 자네…….’

해음은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초록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다 이내, 어쩌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를 초록의 미래를 다시금 떠올리기 시작했다.

초록을 지켜보는 해음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그러나 곧 그런 스스로가 청승맞다고 느끼며 다급히 눈가를 훔쳤다. 해음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발밑에 걸린 이불에 휘청이며 앞으로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해음과 초록의 얼굴이 맞닿았다.

“어…!”

적잖이 당황한 해음이 토끼 눈을 뜬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멋대로 심장이 요동치고 숨이 막혔다.

곧 초록의 암녹색 눈동자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해음을 응시하며, 초록은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해음과 초록은 시간이 멈춰 버린 사람들처럼 서로를 고요히 마주하였다.

“너희 둘 언제 들어…”

돌연히 란이 방문을 열고 두 사람이 있는 공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한 내 거처에서 뭐 하는 짓이야!”

란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실수로 넘어져서…!”

“당장 떨어지지 못해!”

해음의 말은 란에게 전혀 닿지 못했다. 해음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초록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미안…이불 덮어 주려다가 미끄러졌어. 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어.”

해음이 초록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애먼 곳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해음아.”

“어…?”

“너 얼굴이 엄청 빨개. 어디 또 아픈 거 아냐?”

“더, 더워서 그래. 아직 팔월이잖아.”

해음이 대뜸 자신의 얼굴에 손부채질 해댔다. 초록은 그런 해음의 모습을 보며 몰래 미소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장이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초록이 옷장을 열자 다양한 연령대와 시기, 종류를 띠고 있는 남자 옷들이 한가득 나타났다. 소년복부터 성인복, 사계절 한복과 정장, 심지어 현재 유행 중인 옷까지.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거대한 시간의 흐름이 겹겹이 담겨 있었다.

“옷 갈아입을 건데, 거기 계속 있을 거야?”

“…응?”

수많은 옷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해음은 다소 느린 속도로 초록의 질문에 답했다. 왜 이곳에, 이런 옷들이 가득한 걸까…….

“해음이 너 혹시…….”

초록이 옷장에서 방향을 돌려 해음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해음은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변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살짝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혹시 뭐…?”

해음의 앞에 선 초록이 해음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해음은 괜스레 자신의 언행이 의심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초록아.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지극히 도덕적인 사람이야. 불순한 생각은 요만큼도 한 적이 없다고.”

해음이 초록의 눈앞에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모아 보이며 말했다.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초록이 장난기 있는 얼굴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어. 너 반응이 재미있어서.”

초록의 입가에선 계속해서 웃음기가 맴돌고 있었다.

“하나도 재미없거든!”

해음이 어이없어하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데 초록아, 저 옷들 말이야.”

“응.”

“산신이 계속 모아둔 거야?”

“맞아.”

“왜 굳이 남자 옷들을 저렇게 모으고 있는 거야?”

“음…사랑하는 사람을 기리는 방식이랄까?”

초록의 얼굴에 잠시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해음은 초록의 말과 표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해음의 가슴속에 묘한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너희 둘-! 안 나오고 뭐 해-!”

밖에 있던 란이 해음과 초록이 있는 방문을 향해 소리쳤다.

“먼저 나가 봐. 옷 갈아입고 나갈게.”

“응.”

해음이 해소되지 못한 의문을 품은 채 방문을 나섰다. 이어 부엌에 두었던 약과를 들고 마당에 있는 란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산신아! 내가 약과 사 왔어. 맛있게 먹으면서 초록의 미래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지 않을래?”

해음이 꽃에 물을 주고 있는 란을 응시하며 살갑게 대하고자 애썼다. 란은 잠시 자신의 행동을 멈춘 다음 해음의 얼굴을 보며 답했다.

“그 어여쁜 입에 약과 집어던지기 전에 조용히 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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