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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Aug 23. 2023

사랑니

낭만주의자의 기원


겨울여자의 라스트씬 - 장미희

1.

10년간 미뤄왔던 사랑니를 뽑기를 결심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월요일 아침, 주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운동하러 집을 나설 때까지도 일상은 안온했다. 삼백 미터 앞 신호등의 파란불이 보이고, 삼 차선 중 가운데 차선, 시속 70킬로의 정속주행, 내 운전에는 적어도 무리수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 전방 중앙분리대에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뛸까 말까 망설이는 노란 고양이. ‘제발...’하고 외치는 순간 쾅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차가 따라와서 멈출 순 없고 그냥 달렸다. 오른쪽 백미러로 노란 물체가 보였지만 눈을 질끈 감고 배드민턴장으로 향했다. 물론 경기는 엉망일 수밖에. 오전 내내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뭔가 이 우울한 느낌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 ‘좋아, 이참에 사랑니를 빼자.’


2.

내 왼쪽 아래 사랑니는 잇몸 속에 있었는데 이 사랑니를 두고 의사들의 진단은 제각각이었다. ‘신경이 지나가니 잘못 건드리면 안면마비가 옵니다. 나이도 있으시니 그냥 데리고 사세요.’ ‘안 빼면 이웃 어금니까지 썩을 테니 명심하세요.’ 그중 내 투정을 가장 잘 받아준 의사를 찾았다. 엄살이 심한 나는 마취주사만 맞아도 혼절할 지경이었다. 이어지는 발치 시술은 흡사 잔혹 스릴러 수준. 잘은 몰라도 고난도 작업인 듯했다. 이럴 때 의사의 자세한 설명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았다. 잘 나오지 않아서 잇몸을 더 걷어낼게요. 공간이 안 나와서 뼈를 좀 갈고 있어요. 위잉. 지금 이를 절단하고 있어요. 뚝. 영화 ‘마라톤 맨’에서 로렌스 올리비에가 치과장비로 더스틴 호프만을 고문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3.

발치가 진행되는 삼십여 분 동안 난 이상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사랑니가 피터팬이 되어 내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주인님, 왜 저를 버리려고 하세요.’ 난 애써 외면했다. ‘어서, 웬디랑 네버랜드로 돌아가’. 갑자기 서글픔이 밀려왔다. 내 몸에 끝까지 붙어 있으려고 결사항전하는 사랑니도 소중한 내 몸의 일부가 아닌가. 어쩌면 그 피터팬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름은 꿈꾸는 낭만주의자. 피를 철철 흘리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그와 나는 사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어릴 때부터 현실이 힘들 때면 언제나 그와 함께 낭만의 세계로 도피했고,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영화, 음악에 탐닉했다. ‘겨울여자’, ‘병태와 영자’ 같은 70년대 영화를 보며 통기타와 생맥주의 낭만이 넘쳐나는 대학생활을 동경했다. ‘겨울 나그네’ 같은 80년대 영화를 보며 소설 같은 연애도 꿈꿨다. 하지만 도망치듯 고교시절을 보낸 후 꿈에 그리던 캠퍼스에 도착했을 때, 상아탑의 낭만은 이미 실종되고 없었다.


크라운맥주 1000cc


장미희 : 이렇게 쓴걸 왜 마셔요?  김추련 : 나중에 저한테 맥주사달라고 조르실 겁니다.


4.

민주화열기로 뜨겁던 시절, 친구들은 하나둘 급진적인 투사가 되어버렸고, 그토록 짝사랑했던 소녀는 소통불능의 교조적 크리스천이 돼 있었다. 최루탄으로 범벅이 된 교정의 진달래가 아름다울 리 없었고, 낯설게 변한 친구들만큼이나 낯선 전공서적은 현기증만 일으킬 뿐이었다. 이어지는 수업거부와 휴강은 한 학기 내내 계속됐고, 그때마다 나는 낭만주의자와 함께 어김없이 극장을 찾았다. 당시의 내 친구들은 ‘영웅본색’의 주윤발, 장국영이었고, 첫사랑은 ‘가라테 키드’의 엘리자베스 슈였다. 어두컴컴한 재개봉관에서 남몰래 영화를 보는 일은 은밀한 쾌락이었다. 졸업 후에도 힘들고 외로울 때면 난 어김없이 그를 불러냈고,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외면한 적이 없었다. 내게 쏠쏠한 재미와 안식을 전해주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낭만주의자와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고, 바쁜 일상 속에 파묻히면서 난 그의 손을 놓고 말았다. 남들처럼 시시한 농담을 하면서 시간을 허투루 소비했고, 경쟁사회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노곤했다.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난 것이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된 것이다.


영원한 간지 주윤발.. 쾌유를 빕니다.


내 안의 낭만주의자는 마흔이 된 나를 찾아왔다. 비록 야위고 볼품없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형형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왕년의 배우들을 소환하며 나를 다시 시네마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리고 나는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 년간 꿈결같이 행복한 동행중이었는데 지금 나는 아무런 통보도 없이 그를 떠나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잠깐만,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가.


5.

'다 됐습니다. 마취는 두 시간 후에 풀릴 테니, 그때 진통제와 소염제를 드세요.' 여느 치과의사답지 않게 그녀는 매우 친절한 설명을 보탰다. 진통제를 받아 들고 제과점에서 카스텔라와 우유를 샀다. 제과점에서 나와 길을 건너려는데 불현듯 아침에 벌어진 사건이 떠올랐다. 마취가 풀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난 무작정 사고 장소 부근으로 향했다. 아파트의 단지와 단지사이의 큰길, 고양이는 자신의 삶터를 지나다니기 위해 그 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정황이 그려졌다. 그럼 교통사고는 과연 누구 탓일까. 고양이의 도착 목적지였던 단지의 정원은 인적이 드물고 관목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어 나 역시 앉아서 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멀리서 살진 고양이 한 마리가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확인해 보고 싶었다. 놀랍게도 그 노란색 고양이였다. 훠이 훠이~. 귀찮다는 듯 자리를 벗어나는 고양이의 걸음걸이에서 사고 후유증을 엿볼 수 있었다. 살아있었구나! 비틀거리긴 해도 사람보다는 빨랐다. 길목에 카스텔라와 우유를 부어놓고서야 난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6.

일주일이 지난 지금. 아직도 사랑니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다. 새벽에 치통의 여운으로 잠이 깬 나는 문득 조각이 난 채 뽑혀나간 사랑니를 떠올렸다. 잇몸을 뚫고 나와 음식 한 번 제대로 씹어보지 못하고 떠난 사랑니는 보석처럼 예쁜 상아빛을 띠고 있었다. 내 결정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십 대의 감수성을 지니고 살아갈 순 없는 일이다. 현실이 부박(浮薄)하고 거칠어도 혼자 맞닥뜨려야만 하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진자만 자신을 따르라고 했던가.


7.

이제 몇 시간 후면 봉합했던 실을 뽑게 될 것이고, 치통이 사라지고 나면 난 지난 일주일의 추억을 까맣게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아빛의 예쁜 사랑니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내 안의 낭만주의자가 이성(異性)이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떠나보내고야 나는 알았다. 그녀가 내 진정한 첫사랑이었음을. 잘 가요, 내 사랑니, 내 첫사랑이여. (2012.4.19)


https://youtu.be/5d5sCtt5JaY


카라테키드(국내 개봉 베스트키드)에서 조연을 맡았던 엘리자베스 슈








팻 모리타와 랄프 마치오~ 록키의 존 아빌드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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