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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Aug 24. 2023

한국판 기묘한 이야기

<가려진 시간(2016)>



상상력이 풍부해서 평소 유체이탈을 경험하고픈 13살 소녀 수린(신은수)은 오직 같은 반 친구 성민(이효제)이 하고만 말이 통한다. 성민이는 자기의 유체이탈 경험을 알려주고 둘은 신비체험을 위한 갖은 실험을 도모한다. 무엇보다 둘만이 공유하는 언어를 개발해서 세상이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어느 날 수린과 성민은 재욱(정우진), 태식(김단율)과 함께 터널발파 구경을 하려고 산 위에 올라가다가 이상한 동굴을 발견하고 거기서 광채가 나는 알을 찾아낸다. 요괴의 알이라고 전해오는 이 신비한 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그 알을 깨 보자고 말한다. 성민은 수린이가 나오면 깰까?라고 하지만 재욱이의 재촉에 알은 깨지고 순간 세 친구는 시간의 블랙홀 속에 빠져들어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이 만든 이 웰메이드 동화는 한마디로 아득하고 신비하다. 독특한 상상력에 뇌가 흥미를 느끼며 반응하다가 결국은  감정을 흔드는 연출에 무장해제 되고 만다. 넷플릭스의 인기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의 한국판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저예산임을 감안하면 가성비는 훨씬 높고 아이들의 연기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처음 제목만 보고 클릭을 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서 갑자기 강동원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이런 경우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 금요일밤에 우연히 얻어걸린 선물치고는 캐스팅과 스토리, 작품성 모두 수준급이었다. 특히 주인공 수린 역의 신은수는 300: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만큼 사춘기 초입 사차원 소녀 연기의 한 획을 그었다. 강동원과 엄태구의 시간여행은 몽환적이면서 유쾌한 에피소드를 자아낸다. 



영화는 네 번 정도의 변곡점을 지나면서 놀라운 흡인력으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변곡점마다의 오르내림이 짜릿한데 연결이 부드럽고 무리가 없어서 도대체 결론이 어떻게 맺어질지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기본적인 이 드라마의 정서는 슬픔과 외로움이다. 재혼한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고 아저씨(김희원)와 함께 살아가는 수린이나 다섯 살 때 보육원에 맡겨진 성민이 모두 고아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세상이 뭐라 해도 자신을 믿어주는 존재가 그리웠던 둘은 끝까지 의리를 지키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갑자기 어른이 되어 나타난 성민(강동원) 앞에서 수린은 혼란스럽다. 그러나 둘만이 공유했던 비밀언어를 통해 믿음의 불씨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치 않은 법. 수린이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어른이 된 성민을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제발 한 번만 믿어주세요'라는 간절함은 이상한 아이의 망상으로 치부된다. 이 시대의 동심과 기적은 그렇게 짓밟힌다(물론 현실에서 이상한 어른이 너무 많다는 건 이 영화를 보는 아이들에겐 꼭 주지 시켜야 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핵심은 '믿음'에 대한 설득에 있다. 방법적 회의를 주창했던 데카르트의 연역체계처럼 모든 의심거리를 펼쳐놓고 이 이상한 '믿음'과 한판 겨루기를 펼친다. 한마디로 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 관객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심지어 수린이를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 민경희(문소리)도 수린이의 손을 들어준다. 막판에 기적을 경험한 형사(권해효) 또한 수린이의 말을 믿게 된다. 믿음은 설득되는 게 아니라 경험되는 것이다.



<개구리 소년>에서 사라진 아이들이 <사랑의 블랙홀>처럼 맴도는 시간에서 <사랑의 은하수>같은 만남을 갖는 이 독특한 영화는 인간의 직관보다는 빅데이터를 신봉하는 첨단세계에서 더 이상 발붙이기 힘든 '믿음과 기적'이라는 작은 돗자리를 펼친다. 어린아이의 눈에만 보이는 그 신비의 돗자리는 이 쓸쓸한 도시 한가운데에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외롭고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보이는 세계'에서만 답을 찾아내라는 건 또 하나의 냉정한 폭력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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