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문 Aug 31. 2023

라면의 서정

<하트시그널>의 야식

하트시그널 4를 정주행 했다. 청춘남녀 8명은 그야말로 선남선녀이고 성공한 젊은이들이었다. 게다가 마음씨도 곱고 배려심이 깊어 시청자로 하여금 때론 답답하고 때론 안타까운 심경을 느끼게 했다. <나는 솔로>였다면 직진해도 될 상황에 이들은 한번 더 고심하고 전체 입주자들의 마음의 판을 고려하는 듯했다. 

게다가 이들은 어쩜 그렇게 다 잘생기고 어여쁜지 누구 하나 빠지는 캐릭터가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걸 가진 젊은이들 같아 보였다. 현실의 사람들 같지 않고 드라마 같았다. 


<꽃보다 남자>를 방불케 하는 훈남들, 특히 강동원 닮은 신민규의 존재는 고혹적이었고, 가장 젊은 김지민의 상큼함은 봄날의 꽃잎처럼 하늘거렸다. 하지만 이들이 사람이란 걸 느끼게 된 사건은 바로 야식이었다. 분명히 두 시간 전에 그들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슈트를 입고 4:4 데이트를 했다. 그들이 집에 와서 라면을 끓여 먹는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아, 너무 맛있어...' 하면서 호로록 먹는 장면에서 나의 위는 공명했다.


아무리 저녁을 많이 먹어도 허할 때가 있다. 그건 사실 위가 원하는 게 아니라 뇌가 원하는 것이다. 뇌의 굶주림을 채워줄 간식으로 라면은 최고다. 라면은 어릴 적 처음 먹을 때부터 뇌에 각인된다. 그리고 배고플 때 빨리 허기를 채워주는 식품으로 기억돼 있다. 그래서 라면은 한국인에겐 특별한 음식이다. 


라면에 계란을 넣는 것은 고급 음식으로의 레벨업이다. 스팸도 넣는다고 하지만, 계란에 파, 거기에 김가루면 족하다. 면은 푹 익히지 않는 것이 좋고 집게로 여러 번 공기와 마찰시키면서 적당히 꼬들꼬들할 때 불을 꺼주면 뜨거운 국물 속에서 저절로 연화된다. 


찬 밥이 좀 있다면 계란조각이 풀어져 있는 국물로 첨벙 넣어서 적셔준 뒤 떠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라면은 "안성탕면"이다. 어릴 때 먹던 라면의 풍미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면"이 넘버원을 달리고 있지만, 그건 대학생 때 등장한 라면이라 미뢰에 새겨진 오리지널과는 거리가 있다. 


대학원 때 밤새면서 주변 라면집을 자주 찾았었다. 거기엔 신계치(신라면+계란+치즈), 짜치(짜파게티+치즈), 너계치(너구리+계란+치즈)등 새로운 메뉴가 있었다. 허름한 가게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밤을 새우며 끓여주시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몇 년 전 그 자리에 가보니 가게는 확장됐고 더 이상 주인아주머니는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하지 않으셨다.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제일 맛있게 먹었던 라면은 학교 앞 작은 분식점에 있던 계란라면이었다. 계란을 풀어헤친 국물의 농도와 면의 쫄깃한 식감이 단연 최고였다. 아마 지금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어려운 시절 끼니를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한 국민식품 라면. 이제는 종이용기에 직접 끓여 먹는 기계도 생겨났다. 하지만 남이 끓여주는 '파송송 계란탁'이 들어간 라면이 최고다. 늦게까지 일을 한 후 심야에 허기진 배를 채우는 라면야식에는 독특한 서정이 있다. 










작가의 이전글 한국판 기묘한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