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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Mar 25. 2024

그해 여름 - 덜 알려진 좋은 영화


"일 안 해요? 농활 온 거잖아요..."


서울에서 농촌 봉사대로 내려온 석영(이병헌)이 자신의 뒤를 계속 따라오자 민망한 정인(수애). 하지만 추근대는 그가 싫지 않다. 반듯하게 생긴 시골에는 없는 표정. 어설프게 마음을 들키는 사내. 하지만 섣불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긴 어려워 보인다.




조근식 감독의 <그해 여름>은 작품성에 비해 흥행에 실패한 아쉬운 영화였다. 2007년 15회 춘사국제영화제를 휩쓸었지만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 신인여우상, 음악상) 관객은 29만 명에 그쳤다. 오늘 유튜브에서 로이 클락의 Yesterday, When I was young을 들으며 알고리즘이 찾아준 뮤비를 보고 이 영화를 재관람하고 나니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본 서정이 감돌았다.


https://youtu.be/2ZVm-vHeG9Q?si=_MP7vyl47P6Q04MR






1969년, 편백나무 숲을 품은 '수내리'는 김승옥이 만든 '무진'의 느낌이 드는데 거기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사서를 하는 정인의 아버지가 세운 도서관이다. 그 도서관은 수내리의 문화적 생태계를 유지하는 숨터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농활 학생들은 주민들과 어울려 피도 뽑고 옥수수도 수확하고 영화도 틀어드린다. 팀을 리드하는 학생은 표정이 어두운데 시국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삼선개헌(三選改憲)은 1969년 박정희 정권이 정권 연장을 위하여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한 대한민국의 6번째 헌법개정으로 이를 반대하는 학생들이 잡혀 들어가던 때였다. 한편,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던 그 여름이기도 했다.









시골 처녀와 도시학생의 로맨스. <내 마음의 풍금>과 황순원의 '소나기'가 떠오른다. 그런데 보다 보면 <번지점프를 하다>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패왕별희>도 떠오른다. 하지만 가장 닮은 꼴 작품은 영국영화 <썸머 스토리(1988)>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한여름의 추억은 누구나 한 컷씩 마음에 품고 있을 것이다. 블랙홀처럼 빠져드는 그 추억의 세계에서는 매미소리가 이명처럼 아득하다. 사랑은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오기에 무방비상태가 된다. 추억의 완행열차와 홍익회가 끄는 음식카트를 보면 영화 속으로 금세 빠져들기 마련이다. 사이다와 찐계란을 보고 클리셰라고 하기엔 이미 이 영화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정인을 둘러싸고 쉬쉬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를 아끼는 이장의 아들이 한전에서 일하다 감전사하여 유골로  돌아오자 갑자기 이장은 정인에게 분풀이를 한다. "네 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네 가족이 내 아들을 죽이고 우리 마을을 망치는 거여. 이 빨갱이 집안아. "


연좌제. 우리 현대사를 아프게 만든 분단의 잔재. 독재를 유지하기 쉬운 명백한 악마화. 정인은 그 피해자다. 그리고 그날 바로 도서관에 화재가 발생하고 삽시간에 영화는 어둠의 불길에 휩싸인다. 불을 끄는 대학생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은 거의 전소하고 만다. 이장은 밤에 조용히 정인을 찾아와 사과한다. "도서관이 세워졌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미안하다."


한편,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석영은 대책 없이 정인에게 같이 가자고 한다. 무작정 같이 올라온 두 사람. 학교에 잠시 들렀다가 시위대에 둘러싸이고 둘은 경찰에 연행된다. 그리고 정인의 아버지가 월북한 블랙리스트라는 걸 알게 되면서 단순한 시위대가 아닌 간첩사건으로 확대되면서 비극이 시작되는데...




"저 숲, 편백나무 숲에서 나는 향기예요. 그 잎의 향기는 사람을 만나게 해 준다고 우리 부모님이 알려주셨어요."


한 번의 긴 호흡으로 풀어내는 단편소설 같은 작품. 결국 이 영화를 강력하게 끌고 가는 건 각본의 힘이었는데 자막이 올라갈 때 그 작가의 이름을 알았다. 바로 김은희. 역시.


"같이 가요, 언제나 함께 할게요"

"부탁이에요, 그냥 편히 가세요."


남자들의 고백은 태반이 무책임하다. 감정만 앞서고 준비가 미흡하다. 그럼에도 이병헌의 무모한(?) 고백을 비난할 수 있으랴. 게다가 그의 허망하게 넋 나간 표정은 압권이고 복화술로 정인을 웃겨주는 장면은 예술이다.


마지막 서울역 로케이션도 멋지다. 수내리의 실제 로케이션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이다. 편백나무숲은 장성 축령산이었다.


한전에서 죽은 아들이 돌아오고 며칠 후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tv를 연결해서 역사적인 달착륙 중계를 보는 마을 사람들. "그럼 이제 달이 미국이 된 거여?"


55년이 지난 현대인들은 정작 유인 달착륙을 보지 못하는 현실이다. 삼선개헌을 통과시킨 대통령은 십 년 후 비극적으로 떠났고 대학교수가 된 석영은 정인을 그리며 홀로 살아간다. 그리고 방송국 피디 유해진은 정인을 찾아 나서는데. 둘은 극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일종의 신화적인 판타지로도 읽히는 이 슬픈 사랑이야기가 고작 소수에게만 읽혔다는데 깊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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