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양반은 대역 죄인이니 너무 잘해줄 생각들 말어”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 호기심 많은 '정약전'은 그 곳에서 바다 생물에 매료되어 책을 쓰기로 한다. 이에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청년 어부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창대’는 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창대’가 혼자 글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거래라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차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너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지?" 그러던 중 '창대'가 출세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약전'은 크게 실망한다. ‘창대’ 역시 '정약전'과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정약전'의 곁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결심하는데...(네이버 영화, 자산어보)
"17세기 초 조선에 서학서(西學書)가 유포되기 시작한 이후 천주교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다. 처음에는 서양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서학’이라 하거나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서 영향을 받아 ‘서태(西泰: 리치의 호)의 학문’이라고 하였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천주교를 유학에 대비하여 천학(天學)·천주학(天主學)·양학(洋學)이라 하였고, 이단의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사학(邪學)이라고도 하였다.(실로위키)"
정조대왕에게 실학의 눈을 뜨게 만든 삼형제.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은 당시 권력자들에겐 눈엣가시였다. 이른바 사학죄인이라는 명목으로 무참히 살해당하던 시절이었다. 약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순교하였으나 약전은 기지를 발휘해 즉석에서 배교선언을 함으로써 동생 약용을 살려낸다. 그 지혜에 놀란 권력자들은 오히려 약전을 흑산도로 약용을 강진으로 유배시킨다.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는 유난히도 감정을 자극했던 이 봄날의 정서를 가라앉혀주는 힐링 시네마에 다름아니었다. 그리고 국사책에서 흘깃 지나갔던 그 정약전이란 인물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형만한 동생이 없다고 그의 학문의 깊이와 넓이는 약용의 그것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오펜하이머>의 흑백신처럼 흑백은 힘이 강하다. 특히 감정을 가라앉히는 놀라운 효과가 있다. 영화를 끌고 가는 내러티브는 어부 창대와 정약전의 사귐을 통한 간극의 좁힘에 있다.
평생을 성리학에 몰두했던 약전은 진리탐구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 그런 그가 서학을 받아들인 것도 호기심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목숨을 걸만큼 고집이 세진 못했다. 다만, 그는 유배의 공간에서 새로운 지식의 길을 찾는다. 그건 바로 어류학이었다. 문학에서 샘을 발견했으나 그 샘이 고갈되자 서학에서 깊은 샘을 발견했던 약전이었다. 하지만, 진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샘솟았다. 물고기 한 마리 한 마리의 생김새와 오징어의 먹물과 뼛속에도 멋진 원리가 있었으니.
"홍어댕기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댕기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니까요."
창대의 이 한마디에 약전은 무너졌다.
애매하고 끝 모를 공부대신 자명한 사물에 대해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그는 어류 백과사전을 만드는데 영혼을 바친다. 반대로 창대는 그런 무익한 일에 골몰하는 스승이 마뜩잖았다. 그는 거꾸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심취한다. 그리고 천민의 신분을 걷어차고 벼슬을 얻기 위해 매진한다.
오징어의 배를 갈라 먹물이 온몸에 묻은 약전에게 창대가 왜 이 천한 것을 만지냐고 힐난하자 약전이 대답한다.
"이 천한 걸 난 왜 먹고 넌 왜 잡느냐"
성리학과 서학은 다른 게 아니라는 약전의 한마디에 전율이 일었다. 종교라는 것이 자유를 구속할 때 그것은 율법이 된다. 하지만 지금도 대다수의 종교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정약전은 시대를 앞서간 인문학자이자 종교학자였다.
한자를 알아도 해석이 어려웠던 '대학'의 구절을 읽으며 답답해했던 창대의 모습을 보며 새삼 세종대왕의 위대함에 감사했다. 세종대왕이나 정약전이나 호기심의 대가였고 그 궁금증이 세상을 바꾸고 어류도감을 완성해 냈다. 우리는 여전히 궁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