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리처드 기어의 일생이라는 썸네일을 보고 플레이하려다 그만둔 이유는 리처드 기어의 스펠링부터 틀렸기 때문이었어. 멀쩡한 남의 패밀리 네임을 Geer라고 적다니 기가 막히네. Geer보다는 Gear가 떠오를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쓰면 Gere야.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냐고? 글쎄, 어쨌든 그걸 보고 갑자기 리처드 기어에 관한 노가리를 풀고 싶어졌어.
우리나라에서 리처드 기어가 유명해 진 건 바로 <사관과 신사(1982)>때문이었지. 전두환 정권시절, 그 무식한 양반이 士官과 紳士에서 선비 사를 흙토로 잘못 읽어서 ‘토관과 신토’를 재밌게 봤다고 하는 개그가 생길 정도로 이 영화는 유명했어. An officer and a gentleman이라는 원제 그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사관과 신사’로 제목을 직역했지. 일본에서는 <사랑과 청춘의 여정>이라는 좀 더 그럴듯한 제목으로 소개됐었어.
리처드 기어의 인기에 힘입어 1983년에는 <브레드레스>라는 영화도 개봉되었지. 발레리 카프리스키라는 매혹적인 여배우와 공연했는데 막판 죽음의 위기 앞에서 리처드 기어가 춤을 추면서 총을 맞는 장면에서 다들 쓰러졌지. 너무 멋있어서 말야. 1987년 <노 머시>라는 액션 스릴러물에서는 당시의 섹시스타 킴 베이싱어(구 킴 베신저)와 공연하는데 스토리는 잊었어도 꽤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어. 다음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러다가 1990년 <귀여운 여인>이 터졌어. 전 세계 초대박. 신데렐라 스토리로 줄리아 로버츠 자체가 실제 신데렐라처럼 떴지. 리처드 기어도 같이 떴고. 그때 거리의 여인인 줄리아를 스포츠카에 태우고 거리를 질주하는데 그 차가 로터스 에스프리였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 그가 등장한 영화는 많았지만 이렇다 할 수작은 없이 그만그만한 작품들로 수놓았어. 그 이유는 이미 리처드 기어라는 브랜드가 너무 탄탄해서 연기보다는 섹시가이의 이미지로 굳어버렸기 때문인 것 같아.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서 그는 매춘남의 이야기인 <아메리칸 지골로(1980)>로 유명해져서 온갖 유부녀들과 애정을 나누는 인상이 깊이 박힌 듯해. <아메리칸 지골로>는 영화보다 주제가인 블론디의 Call me가 더 유명했지. 1980년 빌보드 차트에서 4주간 1위를 차지했었으니까. 그런데 이 노래를 포함한 영화음악을 서울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를 만든 조르지오 모르도가 작곡했어. 조르지오 모르도 하면 1983년 영화 <플래시댄스>의 사운드 트랙을 맡아서 크게 히트했고 주제곡 Flashdance..what a feeling도 수주간 빌보드 1위를 차지했었지. 지골로(Gigolo)의 뜻이 남창, 기둥서방 등의 안 좋은 단어라서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에 <아메리칸 플레이보이>로 개봉했어.
하지만 내게 리처드 기어하면 역시 첫 인상을 안겨준 <사관과 신사>의 주인공 존 마요지. 존은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방황하다가 인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해군장교가 되기로 결심해. 하지만 입소 후 많은 고난이 그를 찾아오지.
일단 훈련이 무지 고되고 그를 엄청 괴롭히는 교관 거너리(루이스 고세트 주니어)에게 찍혀 징계도 당해. 그때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어. 군대내에서 밀거래를 하다가 걸려서 쫒겨날 위기에 마요가 연대책임을 지고 기합을 받아. 호스로 물을 맞아가며 제자리 뛰기를 하고 흙탕물에 얼굴을 박는 푸시업, 머리와 다리를 들고 견디는 장면. 거기서 교관이 물어.
"그만두지 그래? 너 같은 비뚤어진 놈은 안 맞아"
마요는 외친다. "No, Sir!"
"왜, 재미없잖아. 힘들고."
마요는 울면서 소리친다.
"저는 다른 데 갈 데가 없어요!"
이 대사는 인생의 고비마다 나를 견디게 해 준 대사였어. 빡센 대학원 시절, 청소하고 커피 타고 선배들의 잔심부름으로 견디기 어려울 때 하루는 자다가 꿈을 꿨어. 교수가 그러더군. 힘들면 나가도 된다고. 그런데 나는 리처드 기어처럼 울면서 매달렸어. “아닙니다. 저는 갈 곳이 없습니다.”라고. 깨어나 보니 눈물로 베개가 젖어 있더군.
우여곡절 끝에 리처드 기어는 사관생도에서 장교가 되고 사랑하는 여인(데브라 윙거)에게 당당히 찾아갈 수 있었어. 이 부분이 신파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장교가 된 리처드 기어의 모자를 뺏어서 쓴 데브라 윙거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지.
<사관과 신사>의 주제가인 Up where we belong도 우리나라에선 큰 인기를 끌었는데 조 카커의 허스키 보이스와 제니퍼 원스의 청아한 목소리가 대조를 이루는 멋진 노래야. ‘사랑은 우리를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줘요~’ 라는 이 노래를 들으면, 미셸 오바마가 힐러리의 대선을 지원하며 저급한 트럼프의 공격에 대해 일갈했던 말이 생각나.
"When they go low, we go high“
높이 나는 것은 어렵고 힘든 것이지만, 높이 날아야만 보이는 광경이 있고 누릴 수 있는 바람(風)이 있어. 악(惡)이 이기는 것 같아도 사랑과 인내가 악보다 더 강하다는 걸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자고.
-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기념 촉촉노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