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님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문구처럼 등줄기를 훅훅 볶는 더위다. 이 때만 되면 나는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가 떠오른다.
살다 보면, 삶의 어느 지점에선 “왜 이런 선택밖에 없었을까” 하는 질문 앞에 멈춰서게 된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뜨거운 오후(Dog Day Afternoon, 1975)" 는 바로 그런 순간의 기록이다. 총을 든 남자가 등장하고, 인질극이 벌어지고,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온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지 범죄를 다룬 것이 아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오래 남는 이유는, 그 안에 한 사람의 고통과 한 사회의 무감각한 얼굴이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니는 은행을 턴다. 그의 목적은 부를 축적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연인 리언의 성전환 수술비를 마련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 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혹은 연대이든. 확실한 건, 그 감정이 절박했다는 것이다. 제도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남은 것은 ‘도움’이 아닌 ‘도둑질’뿐이었다.
그래서 소니의 눈빛은 범죄자의 그것이 아니다. 그는 은행 안에서 점점 말이 줄어든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불안과 분노, 체념이 겹겹이 쌓인다. 그 눈빛은 어디서 많이 본 것이었다. 바로 그 2년 전, 알 파치노가 출연한 Scarecrow(1973)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가족에게 돌아가려는 떠돌이였다. 그러나 끝내 가족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맥스는 말없이 떠돌고, 소니는 총을 들고 외친다. 두 인물 모두 사랑을 향해 걸었지만, 끝내 도착하지 못했다. 그 눈빛은 같은 외로움의 잔상이다.
공권력은 그런 눈빛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소니의 목소리를 듣는 대신, 그의 총만 본다. 협상은 흉내뿐이고, 진심은 없다. 인간의 절박함은 ‘공공의 안전’이라는 논리 속에 삭제된다. 언론은 이 이야기를 자극적인 쇼로 포장하고, 군중은 갈채를 보내거나 조롱하며 사건을 소비한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군중은 소니를 연호하기 시작한다.
소니가 외치는 “아티카!(Attica!)”는 단지 과거의 교도소 폭동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티카는 1971년 발생한 애티커 감옥 폭동 사건(Attica Prison riot)으로, 영화속 언급에 따르면 42명이 죽었고, 경찰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짓밟아왔는지를 향한 외침이다. 이해받지 못한 한 남자의 분노가, 시대 전체를 향해 뻗어 나가는 순간이다.
이 작품을 손석희 앵커가 “인생 영화”로 꼽은 것은 단순한 취향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언론인으로서, 그는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권력의 냉기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감지했을 것이다. 단순한 범죄 영화가 아니라, 인간과 체제 사이의 균열을 증언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의 선택은 언론이라는 직업과도 어딘가 닿아 있다.
뜨거운 오후는 끝내 소니를 구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절망은, 스크린 너머의 누군가에겐 충분히 전해진다. 소니는 영웅도, 악당도 아니다. 그는 선택지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얼마나 자주 지나쳐왔던가.
영화 Scarecrow와 뜨거운 오후 사이의 짧은 시간. 그 안에서 알 파치노는 같은 눈빛으로 서로 다른 인물을 연기했다. 떠돌던 청년은 결국 총을 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둘 모두에게 묻지 못했다.
“괜찮냐”고. “지금, 어디가 아프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