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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Oct 27. 2023

인생의 슬럼프를 벗어나는 법

<마녀배달부 키키>의 희망



엄마로부터 마녀의 유전자를 받은 열세 살 키키는 다른 마을에서 1년간 수련을 쌓아야만 마녀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마녀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거나 병을 치유하는 약을 만드는 재주를 지닌다는 의미의 좋은 뜻이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보름달이 뜬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키키는 마녀 수련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빠의 라디오, 고양이 지지와 함께 빗자루를 타고 아슬아슬 날아가는 딸을 엄마는 눈물을 훔치며 바라본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녀배달부 키키>는 일상과 판타지를 자연스레 넘나드는 성장영화다. 아름다운 유럽 항구마을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키키의 비행만으로도 마음이 뻥 뚫리는 시원함이 느껴진다. 키키가 항구마을에서 머물게 되는 곳은 ‘묵찌빠 빵집’이다. 투명한 공기 속에 피어오르는 빵냄새는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준다. 나는 이 빵집을 보며 유럽출장 때 보았던 빵집을 떠올렸다. 낯선 곳에서 머물면서 최소한 먹을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확신은 큰 위로가 된다. 게다가 빵집 주인 오소노 아줌마는 숙소까지 제공해 주는 환대를 베푼다. 비록 먼지 가득한 옥탑방이지만 바다 조망이 가능한 아늑한 쉼터에서 키키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키키는 첫 배달을 성공으로 이끈 후 자신감을 얻지만 두 번째부터의 배달이 난항을 겪는다. 갑자기 세차게 분 바람에 휘말려 고양이 인형을 그만 떨어뜨리고 만다. 하지만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고양이 인형을 찾으려다 만난 화가 우슐라는 훗날 키키에게 큰 도움을 준다.


마녀의 피를 물려받은 키키는 하늘을 나는 재주를 가졌지만 마음은 여린 소녀였다. 아무리 우월한 DNA가 있어도, 신이 준 능력이 뛰어나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키키는 선함과 성실함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감정이 흔들렸다. 어떤 할머니가 손녀에게 보내는 청어파이를 따뜻하게 배달하려고 온몸에 비를 맞으며 배달했는데 정작 손녀의 반응은 달갑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우울감이 밀려들고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 하긴 열세 살 소녀가 집을 떠나 자력으로 살아가는 게 쉽겠는가.




그런데 이 소녀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과정에 이 영화의 주제가 담겨있었다. 오두막에서 혼자 살아가는 화가 우슐라를 통해 키키는 삶의 새로운 단계를 만나게 된다.


“나는 그림을 그려도 그려도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어. 이 그림이 나만의 그림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때 더 힘들지. 그럴 땐 그리는 걸 멈추고 산책을 하거나 동네 구경을 해. 아니면 낮잠을 자거나. 너도 그렇게 해 봐.”


우슐라는 키키를 주제로 샤갈의 그림처럼 멋진 대작을 완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작품 역시 키키가 있어야만 완성이 되는 그림이었다. 키키는 그 그림 속 주인공이 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인생이 그렇다. 아무리 내가 목표를 달성하고 성취를 해도 끝은 없는 것이다. 하나의 과정을 마치면 새로운 산이 펼쳐지는데 때로는 그냥 산에 오르기를 멈추고 싶어 진다. 그리고 우울감과 무기력감이 밀려든다.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때로 잘못된 선택을 한다. 위기 상황에서 가장 지혜로운 것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일단 ‘잘 모르겠다’, ‘지금은 못 하겠다’라고 둘러대라. 그건 탈진상황에서 에너지를 축적하는 필사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널브러져서 며칠 지내다 보면 꼬마전구 불빛 같은 게 깜빡거린다. 그 불빛을 따라가라. 희망이다. 키키는 그렇게 고비를 넘기고 도약을 향한 발판을 마련한다.



제목만 보면 활기차게 날아가는 배달부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인간 내면의 문제에 집중하는 <마녀배달부 키키>. 그렇게 조용히 마무리될 영화였는데 미야자키의 오랜 동료이자 제작자인 스즈키 토시오는 여기에 조미료를 뿌린다. 다름 아닌 마을에 불시착한 거대한 비행선이 다시 이륙하면서 벌어지는 대형사고 장면이다. 이 사고는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1937년 5월 6일 오후 7시, 독일 체펠린(Zeppelin)사에서 제작한 길이 245m의 웅장한 힌덴부르크 비행선이 뉴저지 주 레이크 허스트에 착륙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힌덴부르크 비행선은 착륙하는 순간 대폭발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 대형 참사로 승객 95명 중 35명이 사망한다. 당시 생중계하던 아나운서는 비명에 이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하늘의 타이타닉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비행선은 당시 획기적인 유럽-미국의 여객수단이었다. 하지만 대형참사 이후 안전문제로 더 이상은 운행하지 않게 되었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이 사건을 환기시키며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해내는 키키의 활약으로 영화의 대반전을 이뤄낸다. 미야자키 감독에게 비행은 언제나 즐거운 상상이다. 그 수단이 비행선이든 경비행기든 대걸레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저 인생을 가끔 통과하는 세찬 바람을 피해 안전하게 창공을 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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