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문 Oct 01. 2023

<사이드웨이>의 와인

와인 한 병에 담긴 인생찬가


고등학교 영어교사이자 와인 애호가인 마일즈(폴 지아마티)는 한물간 TV스타이자 절친인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과 캘리포니아의 포도주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마지막 총각여행을 즐기려는 플레이보이 잭은 와인공장에서 일하는 스테파니(산드라 오)에게 작업을 걸고 마일즈의 지인인 웨이트리스 마야(버지니아 매드슨)까지 포함해서 더블데이트를 구성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 잭이 예비신랑인 사실이 드러나자 두 커플은 비참하게 깨진다. 




<디센던트>의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25회 런던 비평가 협회 작품상, 77회 미국 아카데미 각색상, 62회 골든 글로브 작품상(뮤지컬코미디)과 각본상, 11회 미국 배우 조합상(영화부문 앙상블상) 등 전 세계 각종 영화제 350개 부문을 수상한 명작 <사이드웨이>를 뒤늦게 봤다. 전형적인 로드무비 형식의 <사이드웨이>에서  페인감독과 촬영감독은 70년대 분위기를 살리려고 일부러 투박한 화면으로 구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작열하는 태양은 그럴수록 더 생동감이 짙은 장면을 연출했다.


이혼남인 마일즈는 우울증과 진정제로 삶을 달래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그의 꿈은 소설이 출판되는 것이지만 평상시의 삶은 와인으로 시작해서 와인으로 끝나는 와인광이다. 냄새만 맡아도 그 안에 몇 가지 향기가 나는지 줄줄 설명하고 포도색과는 달리 붉지 않은 이유부터 떫은 원인이 탄닌성분 때문이라는 등 와인에 관한 한 거의 달인 수준이다. 그는 피노 품종의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을 예찬한다. “피노는 재배하기에 까다롭지만 관심과 이해를 가지고 보살펴주면 마침내 최고의 맛과 향을 선사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정작 그는 최고급 와인인 1961년 산 샤토 슈발 블랑을 신줏단지 모시듯 보관만 하고 있다. 


난 애주가는 아니다. 그저 생맥주 한 잔이면 족한 주린이? 그런데 주변 술 깨나 하는 친구들이 서서히 소주와 맥주를 벗어나고 있다. 막걸리파와 와인파로 나뉜다. 하지만 둘 다 고수들의 영역이라 내가 따라잡기 어렵다. 특히 와인의 세계는 깊고도 오묘한 느낌이 들어 함부로 얘기를 꺼내기도 어렵다. 그래서 와인의 이름으로 주문하는 사람 앞에선 그저 치즈안주나 먹으며 따라갈 수밖에. 그러다가 영화 <사이드웨이>를 보니 와인이라는 것이 굉장한 매력을 가진 하나의 생명체 같다는 걸 느꼈다.


영화는 와인으로 시작해서 와인으로 끝난다. 영화의 내용도 와인 같다. 입에 착 달라붙는 달콤한 사랑이 금세 맛이 변해 시금털털하게 깨져버리는 장면, 충분히 성숙한 와인의 맛처럼 오랜 기다림이 진정한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유까지 그렇다. 


그러나 인생이 추억의 행로라면 두 친구의 좌충우돌 여행기만큼 낭만적인 일탈 또한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네 사람이 피크닉을 떠나 석양을 바라보며 와인을 즐기는 장면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는 석양의 햇빛이 강렬해서 네 사람의 모습이 사진처럼 뚜렷하지 않다. 역광에 비친 사람의 얼굴은 구분하기 어렵게 하나의 균질한 색채를 띤다. 그리고 그 색은 마치 태양에 익어가는 포도열매처럼 불그스레하다. 



한편, 가장 아름다운 대사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마일즈를 바라보는 마야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전 와인의 삶을 찬미해요. 한 생명체가 포도밭에서 익어가는 모습, 그 포도들이 자라던 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생각하는 게 좋아요. 태양은 어떻게 빛났는지, 비는 왔었는지. 그리고 포도를 재배하고 수확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아요. 오래된 포도주라면 그중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도 생각하죠. 와인은 변화무쌍해요. 병을 따는 시기에 따라 맛이 다르죠. 포도주는 사실상 살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요. 당신이 아끼는 1961년 산 슈발 블랑처럼 제맛을 한껏 뽐내곤 삶을 마감하죠. 최고의 맛을 선사한 후에!” 



우리는 대부분 행복의 순간을 유보하곤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순간을 실패를 두려워하며 견뎌낸다. 마일즈에게(우리에게) 인생  최고의 순간은 항상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미래의(올지 안 올지도 불확실한) 순간을 위해 언제나 현재의 행복을 반납하곤 한다. 반대로 본능에 무모하게 충실한 잭의 거침없는 쾌락은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 잭이 식당 웨이트리스에게 작업 걸었다가 그 남편에게 들켜 알몸으로 쫓겨나는 장면을 보면 중년남성도 철없는 소년 같다. 이 남자 과연 철들까?  


마일즈의 소설이 출판사에서 거절되자 마일즈는 인사불성이 된다. 게다가 잭의 결혼식에서 전처 빅토리아가 재혼하여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가장 비참한 순간에 마일즈는 집으로 달려가 그토록 아끼던 슈발 블랑을 딴다. 마야가 말했듯이 그 와인을 따는 순간이 가장 특별한 순간이 된 것이다. “피노는 재배하기에 까다롭지만 관심과 이해를 가지고 보살펴주면 마침내 최고의 맛과 향을 선사”한다는 그의 주장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를 제대로 알아봐 준 마야 덕분에 마일즈는 자신에게 최고의 선물을 하게 되면서 길고 긴 잠수 끝에 부상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오랜 숙성과정을 거쳐야만 근사한 맛을 내는 포도주처럼 말이다. 결국 행복의 출발은 자신을 돌보는 데서 시작한다.





이전 12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복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