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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Sep 09. 2023

<마라톤맨>의 통증

영혼의 스케일링


“입천정에 한 대 더요. 주사가 좀 아파요.”


이건 눈물 찔끔 정도가 아니다. 세미혼절이었다.

갈아낸 충치 위로 본을 떴다.

다음 주에는 오른쪽에 또 하나의 작업을 해야 한단다. 게다가 충치 치료 때 작은 호스로 계속 물을 공급하고 빼는 모양이었다. 드러누운 상태에서 물이 꼴깍꼴깍 뒤로 넘어가는데 코로 반만 숨을 쉬는 나로서는 거의 익사할 지경이었다.


왼손을 들었다. 숨좀 쉬고 갈게요. 충치치료가 끝나고 치과의사 선생님에게 따졌다.

"입천정 주사가 왜 그리 아프죠? 죽는 줄 알았네요."

“(웃으며) 다음에는 좀 천천히 놔드릴게요”


옛날에 보았던 영화 '마라톤 맨'에서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인공 더스틴 호프만을 고문할 때 치과치료용 기구를 사용했다.





존 슐레진저 감독의 <마라톤 맨>은 특별한 스릴러다. 내성적인 성격의 베이브(더스틴 호프만)는 역사학을 전공하는 유태계 대학원생. 그는 허드슨 강 주변을 늘 달리는 마라토너이기도 하다. 그의 형인 레비(로이 샤이더)는 미국의 비밀요원으로 극악무도한 나치 전범 스젤(로렌스 올리비에)의 다이아몬드를 훔쳤다는 혐의를 받고 미국 정부와 스젤 일당 모두에게 추격을 받다 베이브의 집으로 도망쳐 죽게된다. 이후 베이브는 뜻하지 않게 스젤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전직 치과의사인 스젤은 치과 의자에 앉힌 채 집기를 든다. 일단 치과의자에 앉으면 모든 것을 의사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 거기서 치과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각종 천공기구, 날카로운 연마기 등은 그 용도가 바뀌면 무서운 고문기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영화다. 의사의 별명은 하얀천사였다.


얼얼한 입속으로 말리는 혀를 풀어 웅얼거렸다. 충치치료가 아니라 치도곤이네요. 근데 스케일링은 오늘 안 해요?

“스케일링도 하시게요? 앉으세요.”

괜히 말했나 보다. 한 2년간 스케일링을 안 했더니 상태가 별로란다. 잇몸을 건드리기만 해도 유혈이 낭자했다. 그 이후의 과정은 상상하는 그대로다.


위잉~하고 회전하는 진동기를 이용한 치석제거작업은 스펙터클 스파클링 프로젝트 아니던가. 느낌은 작은 회전톱니가 잇몸틈을 사정없이 갈아대는 것 같았는데 어떤 지점에서는 온몸에 경기가 일었다. 더구나 회전체의 열을 식히느라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이 목뒤로 계속 넘어가는 게 아닌가. 나는 누운 상태에서 거의 잠수한 듯했고, 수영강습 때 배운 ‘음파’를 하면서 겨우 호흡을 했다.


약 삼십 분간 벌어지는 입속 클리닝 작업동안 나는 묘한 상상을 했다. 지난 2년간 입속에서 운반된 수없이 많은 음식들이 스쳐 지나가는가 하면, 입을 통해 소통했던 수많은 언어들이 활자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재갈을 물리지 않은 혀를 통해 내뱉었던 저주와 독설들이 톱니에 갈려나가면서 물리적, 감정적 찌꺼기가 한꺼번에 청소되는 느낌이었다.


신앙의 결단을 한 젊은 날, 내 속의 많은 죄악 된 생각을 모두 버리는 것이 믿음의 완성인 줄 알았고, 그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세상을 향한 결벽증을 가진 세월도 있었다. 하지만 매일 벌어지는 삶의 전투현장은 그저 다소곳한 기도로 해결되는 곳이 아닌 순간마다 결단이 필요한 전장에 다름 아니었다. 삶은 계곡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과 투닥거리고 버텨내야 했다. 그래서 현재의 나는 하천의 중하류처럼 많은 물이 오가는 곳에 서 있다. 큰 물고기와 수생식물이 우거진 하천, 그 아래 뻘도 있는 그런 하천에서...


"다 됐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삼십여분이 지나고 잇몸은 시렸지만, 따개비처럼 붙었던 치석을 붉은 피와 함께 뱉어낼 때 나는 영혼 속에 묻어있는 검붉은 피와 그동안 제거하지 못했던 감정의 쓰레기도 함께 쏟아져 나오는 걸 느꼈다.


<마라톤 맨>의 마지막처럼 나의 치과치료도 해피엔딩이었다. 다만,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던 주인공처럼 나도 1시간 내내 꼼짝없이 모든 걸 인내해야 했다.


“찬 거 빼곤 다 드셔도 됩니다.”


초기화된 컴퓨터의 바탕화면처럼 깨끗해진 입으로 나는 또다시 이것저것을 씹어 삼킬 것이고, 머지않아 또 다양한 레퍼토리의 독설을 뱉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단 삼십 분이라도 영혼을 스케일링하면서 지난 삶을 청소하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에게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아이스커피 대신 뜨거운 커피로 입안을 스팀 청소했다.

커피는 깨끗해진 입안을 유영하며 남아있는 감정의 잔재를 짐짓 목뒤로 넘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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