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2인

대안 9 : 아주 가끔은 만취상태가 되자

by 블루문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봉했을 때 난 고교동창 J와 같이 볼 계획을 세웠다. J와는 고2 때인 1985년, 첫 미팅을 같이 나갔었다. 장소는 광화문 덕수제과. 미팅은 남녀 3:3으로 진행되었는데 서로 말도 없이 어색했고, 나는 유명하다는 팥빙수부터 시켰다. 파트너를 정하기 위해 검은색, 회색, 흰색 중 하나의 색을 고르고 같은 색끼리 매칭을 하기로 했다. 내 마음에 드는 여학생은 검은색이고 J도 검정, 나는 회색을 골랐다. 갑자기 하늘이 회색빛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J를 살짝 불러내서 "야, 우리 그냥 흩어지지 말고 같이 놀자"라고 꼬셨다. 어리바리한 J는 "그.. 그러지 뭐." 이후 맞은편 덕수궁에 가서 수다를 풀었는데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부터 영화이야기로 바람을 잡았다. 그때까진 검은색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잔뜩 기대했다. 너무 혼자 떠들다 점수가 깎이는 것도 모르고.


<와이키키 브라더즈>를 보면 반드시 소주 한잔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던 참이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일부러 저녁시간에 만나자고 했다. J는 전날 술을 해서 힘드니 빨리 보고 헤어지자고 엄살이었다.

"저녁 8:40분으로 예약했으니 그리 알아"


영화를 탄력적으로 운영해 가는 주요 요소는 노래였다. 산타나의 '유로파'의 연주가 시작되면서 나는 영화 속에 스며들었다. 이어지는 삽입곡들은 다 왕년에 한 가락 하던 노래들. 조운제트와 블랙하츠의 '아이 러브 로큰롤', 유니크한 보컬의 함중아가 부르는 '내게도 사랑이', 배철수와 구창모가 함께 부른 '세상만사'까지. 나의 청소년기 추억이 노래와 함께 복원되고 있었다.



식당에서 부침개를 부치던 아줌마의 역할이 심상치 않더니 역시나. 그녀는 이엉자였다. 말하자면 가짜 이영자다. "뭐라구유, 가짜라구유 당연하지유, 진짜면 이만팔천 원에 이런대서 술 못 먹지..." 당차다. 그리고 기뻤다. 가짜들의 항변, 아웃사이더들의 외침이다. 나윤아, 너훈아... 이 영화가 아니고서는 전국 스탠드바에서나 겨우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기왕이면 조영필과 패튀김도 볼 수 있었더라면.


관객들의 웃음이 지나간 뒤 왠지 깊어지는 연민. 블랙코미디적 요소다. 자문한다. 난 진짜인가. 임순례 감독은 그걸 알았나 보다. 동네의 벽보에서 유명인들의 이름을 빌어 하루를 버는 사람들의 고단함을, 호텔 콘서트는 못 가도 삼류 쇼에서라도 문화적 최소 섭취량을 복용하며 이 거친 삶을 이겨내는 민초들의 삶을. 그래도 쇼는 계속되어야만 함을.



영화 속 고등학생들의 장면을 고교동창과 함께 본다는 것. 완벽한 환경설정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파장(波長)은 두 배, 파고(波高)도 두 배가 되리란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영화 내내 주요 장면마다 쏟아져 나온 소주병을 세면서, 서민들의 아픈 마음을 물리적인 속 쓰림으로 전환시켜 주는, 그래서 잠시나마 무거운 마음을 풀어주는 그 알코홀릭 세러피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치료는 바로 임상으로 이어졌다.


술 마시면서 우리는 다시 1985년 여름으로 돌아갔다. 결국 그 미팅에서 성공한 커플은 없었다. '검은색'에게 애프터를 보기 좋게 거절당한 나는 상처받았고, 몇 번이나 J에게 인생상담을 했다. J는 대학 가서 좋은 사람 만나 보란 듯이 살면 된다고 했다.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하지만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우리는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도서관 발코니에서 음악과 영화를 이야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J는 어렵게 고백을 했다. "사실 엄마가 6학년때 돌아가셨어. 아빠는 잠적하셔서 지금은 누나들이랑 살아." 훗날 알게 된 일인데 J는 그때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해 11월 덕수제과에서 둘이 만나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내가 장소를 착각해서 만남이 어긋났고 J는 겨울비를 하염없이 맞았다.


그날 밤 노래방만은 가지 말았어야 했다. 비틀스 특히 존 레넌의 지독한 마니아인 친구. 슬쩍 던진 말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Across the universe'가 있는 노래방을 찾아 세 군데를 옮겨 다녔다. 비 맞았던 이야기를 꺼내며 김범룡의 '겨울비는 내리고'를 부르는 J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난 모른 척했다.


심야의 공기 속을 유영하며 여기 또 다른 부초(浮草)들은 영화의 주제가인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를 계속해서 읊조려 댔다. 새벽은 아직 멀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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