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한 자가 더 지독하다

대안 7 : 주변의 빌런과 말 섞지 마라

by 블루문


사람은 살아온 궤적과 추구하는 비전으로 그 크기가 결정된다. <오펜하이머>에서 대립하는 두 사람,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는 스케일에서 이미 체급이 다른 사람이었다.


스트로스는 구두수선공에서 제독까지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면서 올라왔겠는가. 언제나 한 발 앞서 손을 쓰고 찾아가서 인사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양손을 비비면서 올라온 냄새가 난다. 그에 비해 오펜하이머는 하버드대 출신의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넘사벽의 인물이다. 일대일로 붙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


스트로스는 그를 이기기 위해 시대의 광풍인 매카시즘을 활용한다. 오펜하이머의 친 공산당 전력을 백분활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의 과거를 담고 있는 비밀문서를 타인에게 열람토록 하고 그 결과를 FBI에 보고한다. 그리고 비공개 청문회를 열어 그가 스스로 '나는 공산당이 좋아요'를 말할 때까지 무한 질문을 퍼붓는다. 변호인들에겐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채 마녀사냥을 벌인다. 오펜하이머 부인인 키티의 공산당 가입전력도 모자라 내연녀의 사상까지 소환한다. 그리고 오래된 기억 속에서 약점을 찾기 위해 종횡무진 끝없는 공격을 한다. 좌우잽에서 양훅, 스트레이트까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오펜하이머는 부인의 말대로 한번 빽소리라도 질러야 하는데 천하의 순진무구한 양반은 줄줄이 다 인정하고 자빠졌다.


"공산당 친구들을 아직도 좋아합니까?"

"네"

(환장한다. 요즘 유행어로 허파디빈다.)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를 그토록 집요하게 공격한 이유는 그가 모욕당했기 때문이다. 아니 모욕당했다고 굳건히 믿었기 때문이다. 전혀 무관한 상황에서도 무시당했다고 혼자 오해하며 분을 품은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스트로스에게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그건 스트로스가 오해한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고.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 두 사람이 속삭였고 표정이 싸했다고 자신의 뒷담화를 했다고 믿는 스트로스는 거의 관종이다. 어렵게 올라온 그는 늘 인정욕구에 목말라했으며 자기가 베푼 호의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곧바로 적의를 드러낸다.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요주의 캐릭터다. 누가 적인지 오펜하이머만 모르자 아내 키티는 술잔을 집어던지며 버럭 한다.


그렇다면 오펜하이머는 왜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았을까. 그는 순수하게 나치에게 원자폭탄을 안겨줄 수 없다는 신념하나로 일관했다. 과학자로서 로스알라모스의 시험 폭파까지가 그의 목표였다. 나치에 고통받는 유태인 동족들을 구원하기 위해 가능한 도전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히틀러가 무너지고 일본도 패망하는 판에 이 대량 살상무기를 투하시키는 것이 그에겐 생래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건 피 터지고 실신한 사람에게 돌을 집어 파운딩을 계속하라는 명령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에.


한편,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대립을 보며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떠올랐다. 몸을 뒤집어 연주해도 천재적인 작곡가 앞에서 죽도록 노력해도 명곡을 만들지 못하는 음악가의 열등감은 결국 그를 죽이고 말겠다는 살의로 변했다.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를 서서히 주저앉히는 것처럼 살리에리도 모차르트를 서서히 죽게 만들었다.


아울러 이 영화에 왜 미국이 열광하는지도 관전포인트다. 현재 미국은 신냉전체제에서 중국에 쫓기고 있다. 승전국의 기억을 환기시키면서 초강대국의 영광을 다시 떠올리기 좋은 타이밍이다. 그렇다면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말하고 싶은 요점은 무엇일까. 왜 갑자기 원자폭탄을 소환한 것일까. 그가 소환한 것은 그가 천착하는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만든 주인공들이었다. 아인슈타인에서 닐스 보어까지, 파인만에서 오펜하이머까지 화려했던 물리학의 벨 에포크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조언처럼 결국 과학자는 정치의 시녀였음을 뼈저리게 되새기며 비정한 인간세계의 무상함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고 피 터지게 두드려맞는 오펜하이머를 피해 모두가 달아난 순간, 마지막까지 곁에 서서 같이 싸워준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도 호명하고 싶었나 보다. 스트로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던 상원의원 존 F. 케네디까지.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청문회에서 발가벗고 앉아있던 오펜하이머의 장면이다. 청문회에 인권이란 없었고 승전국 미국에는 더 이상 아량이 없었다. 오직 친 공산주의인지 아닌지의 질문에 예스라는 답을 강요할 뿐이었다. 인류 최고의 물리학자는 그렇게 발가벗겨졌고 혹독한 심리적 고문을 당해야 했다. 스트로스의 그 하찮은 오해 때문에 말이다.


지질한 놈이 더 지독한 법이다.

주변에 이런 사람 누군지 알 것이다. 말 섞지 말고 조심하자.








keyword
이전 06화페이스북 호갱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