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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Nov 17. 2023

애니 홀 - 불안한 로맨스의 서막



구형 던롭 테니스 라켓 가방. 저 사진을 40여 년 전부터 보아 왔다. 


오늘 왓챠에서 본 <애니 홀>. 오래전에 한번 봤으나 오늘 본 게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도 다 이해하지 못했다. 번역으로도 우디 알렌의 속사포 같은 대사 속 의미를 이해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가난한 유태인. 어릴 적부터 엄마의 강압적인 교육에 시달렸고 일찌감치 성에 눈을 떴으나 그로 인해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알비 싱어는 우디 알렌 본인이었다.



그에 비해 정통 영국계 백인 개신교(WASP) 집안인 애니 홀은 어쩌면 다이언 키튼 본인이기도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1년간 영화처럼 사귀었다고 한다. 헤어진 연인이 다시 영화감독과 배우로 만났다는 것 자체가 70년대엔 기가 막힌 사건이었고 이 이슈를 몰아 78년 아카데미 4개 부문을 석권한다.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15년째 정신과 상담을 받는 알비는 프로이트적인 해석으로 모든 일상을 성과 연계시킨다. 체구가 작은 색정광의 느낌이 들게 하는 우디 알렌의 키는 165cm. 다이언 키튼은 169cm. 그리고 극 중 후반에 우디 알렌과 극장 앞에서 데이트하는 여성이 시고니 위버(185cm)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녀를 알아보기 어렵다. 그녀의 단역 데뷔작이기도 하다.



알비는 정신과 상담으로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내뱉을 수 있는 인물이자 상처 입은 고독자다. 그런 그에게 끌렸던 애니 역시 어떤 틀에 갇혀 자신의 본질을 대면하기 어려웠다. 알비의 도움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그녀는 날개를 단다. 그리고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알비는 그녀가 떠나고서야 그녀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애니홀>은 지금 봐도 현대적이다. 섹스에 대한 그들의 솔직함과 사랑과 이별에 관한 쿨함은 시대를 앞서간다. 아니 어쩌면 사랑과 연애는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방예의지국에서만 몰랐을까. 제대로 솔직하지 못했던 1970년대 <애니 홀>의 극장개봉은 그래서 어리둥절하게 슬며시 막을 내렸다. 


그 후 우디 알렌의 두 번째 사랑잡담 <맨해튼>이 거쉰의 음악과 함께 대박을 치고, 80년대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21세기에 와서는 <500일의 서머>가 그 계보를 잇는다. 불안한 로맨스의 서막은 단연 <애니 홀>이었다. 지금 봐도 지적인 수준이 넘사벽이고 예술 영화를 꿰뚫고 정치적으로 좌파였던 (아이젠하워, 닉슨, 레이건을 탄핵하자는) 알비, 아니 우디 알렌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영화를 통해서라도 절절하게 토로하고 싶었던 그의 어두웠던 유년시절에 스산한 연민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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