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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Nov 19. 2023

달빛아래 선 두 방랑자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문리버


뉴욕의 이른 아침. 티파니 보석상 앞에 노란 택시가 정차하고 검은 드레스의 여인이 내린다. 쇼윈도를 바라보며 그녀는 크루아상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꺼내 먹기 시작한다. 빵을 먹는 건지, 보석에 취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몇 입 먹는가 싶더니 잠시 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다시 본 감상은 전혀 새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 영화를 1981년 KBS명화극장으로 봤기 때문이다. 흑백화면으로 본 후 40여년이 흘렀다. 내가 기억하는 몇몇 시퀀스를 제외하면 이 영화를 이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큰 수확이다(앞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확률이 매우 낮으니까). 당시 오드리 헵번은 성우 장유진 씨(1945~)의 담당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구슬 같은 그분의 목소리 더빙이 이명처럼 들렸다.



홀리 골라이틀리(오드리 헵번)는 사교계에서 부유층 남성들과 사귀며 돈을 번다. 대부분 가정이 있으니 불륜남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매너가 그리 좋지 않아 홀리는 그들을 쥐새끼라고 부른다. 한편, 감옥에 갇힌 샐리라는 마피아 보스를 매주 면회 가는 홀리는 그가 전하는 일기예보 형식의 암호를 그의 변호사에게 전달하고 용돈을 받는다. 강력한 스폰서인데 훗날 그 암호가 마약밀매와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폴 버잭(조지 페퍼드)은 가난한 소설가로 우연히 홀리의 윗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그녀와 마주친다. 폴 역시 부유층 사모님과의 육체적 관계로 경제적 후원을 받는데 타자기의 잉크가 마른 걸로 보아 거의 절필 상태임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날 폴은 창가에서 Moon River라는 노래를 부르는 홀리를 보고 그녀에게 마음을 뺏긴다.



1961년 뉴욕의 모습은 매우 현대화 돼 있었다. 요즘 우리의 생활과 유사한 테이크아웃 커피잔, 크루아상이 이미 60년 전 뉴요커들의 흔한 아침식사였다는 점을 1981년에는 알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커피는 티스푼으로 덜어 프림과 설탕을 넣어 타 마시는 동서식품의 맥스웰이 전부인 줄 알았으니까. 급변하는 한국사회를 살아온 것과 60년간 그다지 큰 변화 없는 뉴요커의 삶은 많이 다를 것 같다. 패션도 지금에 비해 촌스럽지 않고 세련됐다. 두 사람이 자주 입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는 지금 봐도 훌륭하다.




당시 뉴욕의 다가구 주택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게 매우 잘 지어졌다. 비록 작지만 싱크대와 냉장고 거실, 침실이 잘 갖춰진 구조에서 홀리는 큰 부자(정확히는 부자의 후처)를 꿈꾸며 살아간다. 처음 만난 폴에게 그녀는 고양이의 이름이 아직 없다고 말한다. 나중에 궁전 같은 집을 갖게 되면 그때 고양이의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기분이 다운되면(red) 항상 티파니를 찾아간다고 말한다. 우울하다(blue)는 표현이 맞지 않냐고 하니까 red는 blue보다 더 처량한 상태라고 항변한다. 그녀의 우울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영화는 곧이어 그 우울증의 기원을 폭로한다. 어느 날 찾아온 골라이틀리 박사는 홀리의 본명은 '룰루메이'이고 14세에 자신의 후처로 들어왔다가 도망친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그녀가 끔찍이 사랑하는 동생 프레드는 군복무 중인데 곧 제대하기에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득한다. 하지만 홀리는 더 이상 시골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구름 위의 삶을 살고 있었고, 화려한 '티파니'의 꿈을 현실과 혼동하고 있었다. 허우대 멀쩡하게 잘생긴 작가 폴 역시 그녀의 무모한 삶을 타이를 처지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룰루메이와 폴, 아니 홀리와 프레드(홀리는 폴을 프레드라고 불렀다)는 Moon River의 가사에 나오는 두 방랑자(Two drifters)였다.



인생에서 한 번은 제대로 결심해야 할 순간이 있다. 폴은 자신의 스폰서인 2E(패트리샤 닐)에게 관계를 끝내자고 제안한다. 그의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2E는 돈으로 그를 주무르며 자존심을 건드린다. "누군지 모르지만 여자가 생겼다면 잠시 여행이라도 다녀와. 아니면 잠시 휴직을 해도 되고. 난 노동자의 합리적 권리를 인정하니까." 60년 전 영화의 대사라곤 믿을 수 없는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돈이면 사람의 영혼도 살 수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폴은 양복 한 벌 챙겨 들고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이제 소설도 열심히 쓰려고 한다. 홀리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리는 그의 진심을 믿기 힘들다. 남자들은 모두 쥐들같이 자기를 갉아먹으려 했기에 그녀는 "난 당신의 소유가 될 수 없어요."라고 저항한다. 늘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며 정작 자기 자신이 되기를 부인해 왔던  홀리. 그녀는 이름 없는 고양이처럼 삶이라는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다 직면의 고통이 시작될 때면 '티파니' 뒤편으로 숨어 겨우겨우 버텨냈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비가 내리는 거리의 기억은 40년간 잘 보존되고 있었다. 홀리는 브라질로 떠나겠다고 우기며 고양이를 택시에서 내쫓지만 잠시 후 후회하며 고양이를 찾아 거리를 헤맨다. 비에 젖은 고양이는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기에. 폴 역시 이제 남은 건 타자기 밖에 없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두 남녀와 고양이는 그렇게 한 배를 타고 Moon River를 출발할 것 같다. 많은 굴곡을 경험했던 그들의 앞날이 마냥 밝지만은 않겠지만, 적어도 환한 달빛만큼은 그들을 배신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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