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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자차 Jul 20. 2024

영화 낙원의 밤 후기 (5)

죽은 뒤의 세계


육지에서 제주도를 보면 왜 이렇게 복잡한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제주도에 안 가본 사람도 아니고 각자의 고향처럼 특별하기도 수수하기도 한 곳인데, 이상하게 제주도는 좀 다르다. 딱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낭만적인 유배지. 과거부터 유배 가는 선비는 제주도로 향한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제주도는 신비롭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하다. 카메라 속 낙원은 해가 뜬 날에도 꼭 물속에 파묻혀 있는 곳으로 보였다. 수영장이나 목욕탕에서 잠수하면 온 세상이 파랗게 보이고 소리는 선명하게 안 들려서 꼭 우는 듯이 들리는 것처럼, 병원에서부터 내린 비는 당연한 결말이 구슬픈지 모두가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있었다.

     

섬은 육지와 바다로 갈라진 장소라 신비로우면서도 의뭉스러운 상상을 하게 만든다. 멀거니 섬을 바라보면 저 섬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고 절묘한 위치에 혜성이 떨어지면 하늘의 계시 같기도 하다. 파도가 심하게 치는 날엔 침침하고 어둑한 하늘 사이에 보이는 저 외딴 섬을 파도가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되고, 활짝 갠 후의 섬을 보면 어떻게 저 파도와 험한 것을 꿋꿋하게 버텼을까 싶기도 하다. 꼭 신이 머무는 곳처럼. 재밌지. 원래 섬과 육지는 하나로 이어져 있고, 그냥 그 움푹 파인 곳에 물이 좀 많이 고여있을 뿐이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는 내 두 발과 의기양양하게 흐르고 있는 바다다. 육지에서만 이렇게 보일까? 어린 시절엔 지구본에 보이는 대륙과 섬의 차이를 이해하기 어려워 큰 섬과 작은 섬으로 생각했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게 대륙은 그저 커다란 섬이다.

     

이 육지에서 유배를 당한, 재연의 말을 빌리자면 사고를 치고 사형선고를 받은 태구가 제주에 내려오면서 잠시 머물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곳이 저와 비슷한 사연을 갖은 쿠토의 집이었다. 재연은 첫날부터 태구에게 날을 세우다 돈 몇 푼에 조폭과 엮이기 싫다고 잘라내며 밥그릇을 뺏어간다. 제 가족을 앗아간 조폭을 또 보게 되다니, 얼마나 징글맞았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태구는 없어진 밥그릇에 한 번, 재연의 총 솜씨에 한 번, 그의 가망 없는 병에 직감으로 과거 조폭이었던 쿠토와 자신을, 그리고 누나와 지은의 모습이 재연에게 보인다. 병원 의자에 나란히 앉아 쿠토에게 자판기 커피를 건네고 세수하지 않은 얼굴을 민망하게 긁적거리는 모습은 쿠토와 태구가 동병상련이라는 것을 알린다. 그 몇 푼 안 되는 자판기 커피를 나눠 마시며 둘만 이해할 수 있는 속사정을 나눴다.

     

태구가 도망친 제주도는 낙원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가족의 죽음 이후 복수하던 장면과 공항에 도착하자 추적추적 비 내리는 장면을 보며 칼칼한 컵라면과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그가 가족의 복수를 할 때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근심 걱정이 사라지기는커녕 떠날 때 흘린 핏자국이 바다를 건너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태구가 복수할 때 한숨이 흘러나온 까닭도 그래서였다. 복수하고 싶었던 태구는 양도수를 핑곗거리로 삼지 않았을까. 형님도 그러시길 원하지 않느냐는 대사가 비극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웠다. 그렇게 복수해서 도망치려거든 차라리 하질 말지. 어디에 있든 내가 있는 곳이 땅 위라면 육지나 섬이나 다를 곳이 없을 텐데. 사람이 여럿 모이니 섬이 육지가 됐지, 또 무덤 위에 섰구나. 미국 가면 20%, 러시아도 비슷할 텐데. 하지만 누나와 조카라는 등대의 불이 꺼져버린 태구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어떤 일을 하면 그 일이 삶의 일부가 돼버린다. 내 삶이 그 일과 닮아서 하게 되는 건지, 아니면 그 일이 잘 맞아서 삶에 들어온 건지 딱 정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나는 일을 하고 그 일에서 삶을 비추어 본다. 태구의 일은 잘할수록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라서 언제나 외롭고 불안했을 테다. 김형진으로 낙원에 도착했을 땐 언젠가 누나와 나눴던 말들, 일을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아볼까 하는 꿈 같은 것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연의 죄책감과 원망 섞인 한탄에 물회를 먹으려다 그만둔 것처럼, 둘 사이를 식탁과 창틀이 막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제주도에 온 이유를 다시금 떠올리며 몸을 단속했다. 재연이 하는 말은 곧 누나가 태구에게 하는 말과 같았을 거고, 재연이 처한 현실은 태구가 가족에게 만든 현실이며 동시에 자신이 처한 현실과 같았을 테다. 그래서 가볍게 던진 재연의 말에 딱 거절하며 문단속까지 철저하게 하는 모습과 그 옆방에서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잠긴 장면은 그의 업이 삶을 삼킬 것을 보여주었다.

     

지은이는 미니미니를 좋아했나 본데, 나는 보드게임을 좋아했다. 그중 피사의 탑은 아직도 우리 집에 있는 것 중의 하나다. 이 게임은 꼭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는 일과 닮았다. 꺼낼 때 뭘 꺼낼지 고민하게 되고, 이걸 꺼냈다가 무너질까 봐 긴장하고, 안 꺼내자니 진행이 안 되는 점들이 참 닮았다. 게다가 처음 쌓을 땐 몇만의 퇴적층처럼 굳건한데, 막상 하나씩 꺼내면 결국 무너지게 되니 처음엔 대체 이 게임은 왜 하는 건가 싶었었다. ‘쌓아놓고 빼고 무너지고? 안 무너져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걸 왜 해?’ 재미로 하던 때를 지나고 한참을 벽장에 넣어놓다가 어느 날 불현듯이 그 닫힌 놀이 상자가 떠올랐다. 무너짐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다시 쌓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줄곧 했던 게임이 빛을 낸 순간이었다.

     

그래서 태구가 물회를 먹는 장면은 재연의 구역에 침범하듯 비스듬하게 찍힌 식탁처럼 한결 편안했고, 재연의 것을 먹는다며 내민 젓가락과 그를 막는 재연의 젓가락은 피식 웃음이 나오게도 즐거워 보였다. 첫날 마주쳤을 때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씨 하면 눈치 보고 사형선고 당한 꼰대라며 긁는 어린 애한테 먹히지도 않을 성질도 냈었는데, 이젠 함께 앉아 죽기 전엔 꼭 먹어야 한다는 물회를 먹으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낸 장면은 늘 피를 흘리며 생사를 넘나들던 태구에게서 가족을 끔찍하게 아끼며 그도 한때는 조폭이기 전에 물회를 보며 엄마 냄새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비추었다. 더불어 앞에 앉은 재연에게도 원망과 고통으로 남았던 가족이란 존재를 아픔 없는 시각으로 기억하는 고마운 말이었을 것 같다.

     

태구의 모습에서 참 좋았던 부분이 그런 부분이었다. 직접적으로 나도 이런 과거가 있고, 내 가족은 어떠하고, 나로 인해 죽었고, 그래서 내가 복수했고, 나도 곧 죽을 목숨이라는 주절거림이 아니라는 점 말이다. 태구는 그냥 말이 없을 뿐인데 배려 아닌 배려 덕에 재연은 그날 밤이 민망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저도 태구처럼 조금이라도 좋았던 가족과의 일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 같다. 재연은 괜찮지 않은 사람에게 괜찮냐고 묻는 것을 싫어하는 어색함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걸 고맙다고 말하는 태구를 오랫동안 기억할 테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맛있게 물회를 먹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장면은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편한 시간이었겠구나 싶었다. 영화 내내 유일한 낙원이었고, 바닷물이 발을 적시듯 눈앞에 당도한 무너짐에도 덤덤하고 비워진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구나 싶었다.

     

반대로 늘 총알을 품고 살았을 재연에겐 무척이나 마음이 먹먹했다. 삼촌이 죽은 뒤에야 실은 내가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았노라고 털어놓으며 멍울진 심장을 누르는 모습이 참 안되었다. 재연의 병은 진짜 몸의 병이기도 하고 또 마음의 병이기도 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총을 쏘는 것은 물리적인 총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가능했다는 것을, 그런 마음이 사는 동안엔 나를 괴롭히고 죽은 뒤에도 제 가슴에 남을 거란 것을 그땐 몰랐고 지금은 알게 되었다는 상징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도 든다. 비록 무리한 일이고 불가능할지라도 재연이 원망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재연의 마음에 남은 돌은 없지 않았을까. 원망하고 살아온 재연이가 그 원망을 다 풀기도 전에 또 다른 아픔을 겪는 장면은 반복의 반복인 것 같아 참 슬펐다.

     

복수는 무엇일까. 이런 장르에서만 생기는 불행은 아니라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욕심으로 생긴 악연이 복수로 이어지고, 그 복수가 또 다른 악연을 이끄는 건 너무 많이 봐왔다. 사는 것과 죽는 것들 사이에 있는 ‘우리들 일이 다 그렇지 뭐’라던 황 사장의 말은 그들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말은 아니다. 안 그랬어도 되는 일이나 그러지 말아야 하는 일을 저질러 놓고는 악연의 악연의 악연으로 ‘다 그렇지 뭐’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정리하기엔 그것 때문에 또 반복되지 않나. 그래서 그나마 인간적이라는 마상길의 계산법이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면모도 그다지 좋은 방법으론 보이지 않는다. 태구나 마상길을 보면 당장 눈앞보단 멀리 보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태구는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마상길은 조금 더 주변을 살폈더라면 조금 더 나은 길로 고비를 넘기지 않았을까 싶다.

     

양도수, 황 사장, 부산 깡패, 마상길, 진성, 쿠토, 태구, 재연의 모습은 조폭이라는 것만 빼면 그 삶의 방식이 여느 세상의 방식이나 비슷하게 보인다. 사람을 방패 삼은 양도수, 당랑거철을 알고 있는 황 사장, 욕심에 눈이 먼 부산 깡패, 계산 잘못한 마상길, 충심만 있던 진성, 예고된 선택을 한 쿠토, 믿음 아래 핑계를 둔 태구, 스스로 파괴하던 재연이. 각자의 낙원은 코앞에 두고 밤눈이 어두워 길을 잘못 들었나. 근데 저들의 모습 중 나의 모습이 아예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인물의 불행한 결말을 보며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내게 어떤 낙원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낙원으로 가기 위해 수없이 긁고 긁혔던 일에 미안해지고 죄책감이 든다. 그때 내가 쏜 총이 몇 발이었을까. 그중 몇이 맞았을까. 나는 얼마나 맞았더라. 낙원을 쫓다 낙원을 선택한 그들을 보며 다시 놀이 상자가 떠올랐다.

     

낙원(樂園)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두 개의 의미는 이것과 분리된 저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말미암은 저것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해지는 방법은 문제에 매달려 휩쓸리고 고뇌하는 것이 아닌 마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염두에 두듯이 문제 자체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탑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떻게 쌓을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잘못된 조각을 뽑아 쌓는 어리석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잘못된 조각을 뽑았을지라도 내가 그것을 바로 볼 줄 안다면 무너짐에 대비하며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록 무너졌을지라도 탑은 다시 쌓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할 줄 안다면 영영 놀이 상자에 갇힐 일도 없을 것이다.

     

낙원을 맞이하지 못하고 밤에 갇힌 이들이 다시 낙원을 찾아 떠나길 바란다. 다음 생이 있다면 밤에 머물지 말고 따뜻한 빛을 따라 낙원으로 가기를 바란다.





끝!


               


출처 네이버 낙원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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