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ian Lessons
이럴 때 추천해요_
-외국어 학습자
-언어학 분야를 공부한다면
-언어가 만드는 세상을 알고 싶다면
-거짓말이 숨긴 진실
영화 정보_
제목 : 페르시아어 수업
감독 : 바딤 피얼먼
개봉일 : 2022.12.15.
장르 / 러닝타임 / 기타 : 드라마 / 128분 / 러시아 연방, 독일, 벨라루스
출연 :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라르스 아이딩어, 레오니 베네쉬
들어가는 글_
꼭 봐야 할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면 안 보고 배길 수가 없다. 왜 그렇게 유명한 영화인가 궁금했는데 나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시간이 지난 후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또 다른 감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땐 언어가 아닌 다른 부분에 중심을 두고 봐야겠다.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영화이다. 하지만 무언가 나를 잡아당기듯 반복해서 보게 되는 그런 영화다.
언어를 배울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나는 제2언어를 배울 땐 목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면 교육의 방향이 달라져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없게 된다. 사실 무엇이든 목표를 두고 전진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있기는 하다만, 특히나 단기간에 최대의 효율을 내기 위해선 가시적인 계획을 정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공부도 그렇다. 그래야 그에 맞는 내용으로 수업을 구성할 수 있고, 학습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수월하다. 코흐는 이런 면에서 가장 목표 의식이 뚜렷한 학생으로 보였다. 게다가 그는 하루에 학습할 양도 정확하게 정해놓았다. 학습자의 모습으론 정말 최고였는데, 이런 영화에서 이렇게 만나니 내 안의 모순된 감정이 일었다.
코흐의 방향은 수업의 방식을 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첫 수업은 언어의 기초인 자모를 익히고 발음을 학습하는 것이 아닌 어휘 학습이었다. 그의 모습이 마치 모어를 습득하는 것과 같았다. 질레트가 교사이자 부모가 되고 코흐는 학생이자 그의 자식이 된 것이다. 어린 아이가 입을 벙긋거려 엄마나 아빠를 부르는 것처럼 코흐는 질레트의 발음을 듣고 따라했다.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많은 어휘를 습득하고 학습자의 말하기 능력을 높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동시에 코흐와 질레트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도 궁금해졌다. 모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같다면 앞으로 더욱 정서적으로 가까워질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코흐의 적극적인 태도는 초보 교사 질레트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어휘를 계속해서 만들어야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 하는 고통! 질레트의 속임수는 분명 한계가 있다. 몇 가지의 단어는 지어낼 수 있어도 그 외의 단어를 모두 새로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약간의 우연은 있을지언정 언어의 체계는 마구잡이가 아니다. 인간의 사고력을 길러주는 고급 수단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이를 새롭게 만들려면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구조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질레트가 이름을 본따 단어를 만들어 내는 방법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무척 흥미로웠다. 조금만 눈치가 있다면 들킬 것 같아 떨렸고, 한편으론 가능할까 궁금했다. 결과적으론 성공해서 다행이었지만, 코흐가 질레트에게 수감자 명단을 기록하는 일을 맡기지 않았다면 그의 언어도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데엔 한계에 부딪혔을 거라고 생각하니 여전히 마음이 철렁내려 앉는다.
질레트는 자신이 만든 언어를 쓰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라면 마치 사전적 정의로만 알던 어휘를 현실에서 직접 경험하게 되었을 때의 감정과 비슷했을 것 같다. 만약 이렇게 생명을 가진 언어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사용하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해 나의 세계를 성찰하고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을 고찰하려고 할 때가 아닐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환경과 삶에 대해 사유하고 고뇌했으니까 언어가 발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신호인 기호가 아니라, 기호와 표현에서 유추할 수 없는 뜻을 담았을 것이다. 그 많은 어휘와 복잡하고 긴 문장을 사용한 이유도 본능에서 벗어난 찰나에 깨달은 게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영화에서 본 여러 장면들처럼 말이다.
만약 어느 날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면 가장 먼저 어떤 질문을 할까. 내 기억을 돌아보면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나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질문했었다. 한참 언어를 배우던 코흐가 사랑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할 때, 질레트의 권유에 감춰둔 말을 하는 모습과 이탈리아인에게 자신의 옷을 건네는 모습도 그와 비슷한 것 같다.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독일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의견이나 철학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 말하고, 정해진 범위에서 그들의 뜻에 맞게 생각하는 것만이 허용됐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생각도 아니고 내면의 소리도 아니다. 언어를 사용함에도 자아가 상실된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언어를 사용하여 얻어야 하는 진짜 가치는 나의 진실된 자아인 것이다. 나의 내면에 어떤 산이 있는지, 어떤 소용돌이가 치는지, 어디로 향하는 중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나를 기준으로 바깥을 향하는 언어에서 벗어나 안을 향하는 언어일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와 쓰임이 있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초반의 코흐와 독일 군인의 모든 언어는 자신의 내면을 향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죽었고, 비인간적인 행위가 자행됐고, 도덕과 윤리가 없었다. 인간임에도 다른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의 존재를 자신의 발 밑으로 내리려 애썼다. 자신의 행동을 당당히 말하던 이탈리아인에게 총을 쏴 입을 막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코흐는 질레트의 언어를 배우면서 점점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것을 질문하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사고방식을 형성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희생된 친구들의 이름을 품은 언어를 말하며 내면을 그리고 질레트를 향한 것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인 대신 죽으러 가던 질레트을 찾아내 구해내는 장면은 그런 의미의 정점이라고 보았다. 두 사람만의 언어로 말을 걸고, 자신의 명예가 손상이 되었어도 나서주고, 이것은 결국 옳지 않은 일이며 그저 살인이라고 터트리는 질레트에게 자신은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하는 코흐의 우는 듯한 모습은 전부 그들이 공유한 언어가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들이 존재하는 그 현실을 알아보게 해주는 언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의 결말은 매우 합당하며 동시에 안타까웠다. 시간이 더 많았더라도 바뀌지 않았을 것 같아서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만든 언어의 특별한 세계는 필연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언어의 의미와 의도가 두 사람에겐 서로 다른데다 이해한 깊이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코흐가 질레트를 떠났을 때부터 이 언어가 가진 생명은 죽었으며, 세계는 파괴되었다. 언어를 선물한 어머니인 질레트를 떠난 곳은 이상이 아닌 현실이다. 신뢰가 공유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타국 땅에서 모국어로 소통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가 질레트의 언어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적어도 그 언어가 가진 어원을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현실의 코흐는 비극을 맞이했다.
반대로 질레트의 현실이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세상이 곧 그가 만든 언어와 같은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질레트는 언어로 의식을 만들었다. 그 세계에는 자신과 같은 유대인, 유대인이 아니지만 억울하게 사라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질레트가 아픈 와중에도 자신이 만든 언어를 말하며 코흐를 다시 인도하는 장면은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비극적인 현실과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 하지만 그 언어를 쓰는 질레트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 언어 안에는 수많은 이의 영혼이 있었기 때문에 도착한 곳에서 질레트의 언어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살아남고자 만들어낸 언어에서 그 언어의 어원을 풀어냈다. 그에게 그 언어란 생존을 위한 도구를 넘어 자아 그 자체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기억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며 질레트의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우리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을 점령 후 조선어 말살정책을 펼쳤다. 지금은 일본에서도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습자가 증가한다지만, 그때만 해도 조선어는 사라질 위기에 있었다. 하지만 우린 우리의 언어를 지켜냈다. 질레트가 죽음으로 사라진 사람들을 언어로 기억했듯이, 우리도 언어를 지켜내 사람을 살리고 얼을 지킨 것이 아니었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어떤 어원을 갖고 있으며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전달하고 있을까. 나는 나에게 그리고 이 언어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있을까. 나는 한글을 창제한 의도에 맞게 잘 사용하고 있는 걸까. 한글은 세상의 이치를 담고 있는 글자인데 나는 그 글자를 사용하는 한 사람으로서 몫을 다하고 있는 걸까.
이번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런 보물을 찾아가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 영화 속 페르시아어는 매우 슬프고 가슴 아픈 진실이었다. 영화에서도 현실에도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와서 다행이다.
영화에서 나와 너의 어원을 정하는 질레트의 모습이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