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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추천] 눈, 눈, 눈

판소리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 '주인과 하인'

by 사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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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얼씨구_

판소리라면 춘향전 외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춘향아~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조선시대 이몽룡표 로맨스는 영 내 취향이 아니었기에, 또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수능으로도 충분했으니. 그래서 이 공연을 보러 가자고 했을 때도 심드렁했었다. 게다가 토요일 오후 늦은 공연. 연말이라서 주말에도 출근하는데,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쉬는데, 그것도 출근하는 토요일에, 그것도 오후에? 그런데 공연을 보고 난 후엔 정말 갔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왜 그들을 소리꾼과 고수라고 부르는지 강렬하게 알게 되었다.




등장인물 지화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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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줄거리 절씨구_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을 판소리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잠깐 설명하자면 러시아를 배경으로 그 마을에서 꽤 부자인 바실리, 성실하고 말 없는 일꾼 니키타, 귀여운 말 제티가 주로 등장하는 이야기다. 바실리가 제 땅 값이 얼마인지 제대로 모르는 바보 같은 젊은 청년에게서 산을 매입하기 위해 니키타, 제티와 함께 마을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오직 이윤만 머리에 있던 바실리는 그의 성미대로 오직 손해 없는 장사를 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는데, 왜 자꾸만 길을 잃는 걸까?




플레이그라운드_3_축소본.jpg 출처 네이버 LG아트센터 이자람 판소리 눈,눈,눈




소감 좋다_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이 등장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무대 중앙에 자리한다. 고수는 무대 우측에 앉아 북을 치면서 흥을 돋우었다. 소리꾼이 이야기를 풀어갈 때 이야기의 방향이나 분위기에 따라 북을 치는 소리의 크기나 박자를 다르게 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고 푹 빠져서 보게 되는 신기한 일이 있었다. 중간중간 소리꾼의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기도 하는데, 그 말투가 굉장히 재밌었다. 아주 격양되지도 않고, 너무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하고 조용하고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마치 삼삼~한 삼계탕 국물을 한 모금 마신 것처럼 한 마디씩 툭 던졌다. 근데 그것이 꼭 소금 한 꼬집씩 톡톡 던지는 느낌으로 입맛에 톡톡 맛을 더했고, 꼭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 같아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었다.


보통 추임새라고 하면 교과서에선 ‘얼씨구’를 배웠었는데, 이번에 들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어서 더욱 웃겼었다. 약간... 이런 것이다. 러시아는 면적을 말할 때의 단위가 ‘뭐뭐야드’랑 하나가 또 있는데, 아무튼 단위 앞에 숫자가 클수록 크기가 크다고 소리꾼 이자람이 그랬다. 바실리가 그 커다란 숲을 굉장히 싼 값인 팔천 루블에 샀을 때 이윤이 이만 루블이 남는다고 했던 것 같다. 청중인 나는 숫자의 0이 몇 개인지 생각을 하며 혼란스워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종일 숫자랑 씨름하다가 와서 과부하 상태였는데 고수가 옆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비싸네.


고수가 없었다면 나는 그 대목에서 0의 개수를 헤아리며 잠깐 극을 놓쳤을 것이다. 어쩌면 ‘이만 빼기 팔천...일만 이천...아까 몇 야드였지...? 야드 말고 뭐 있었는데, 그게 더 크다고 했나?’ 이러면서 잠시 멍하게 있었을 테다. 내가 또 숫자에 약한 걸 어떻게 알고~ 고수가 그걸 ‘비싸네’로 정리해서 좋았다. 내 기억에 맞다면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고수가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청중의 속마음을 적절히 대변하면서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도와줬다는 것이다. 정말 좋았다. 고수가 북만 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면 큰 착각이다. ‘오호’라던가 ‘그래?’라던가 ‘그렇지’처럼 몇 마디 없지만, 아주 적절한 순간에 딱 좋은 말로 청중의 집중력을 확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고수의 참여로 소리꾼의 이야기에 더욱 빠져들게 된다. 소리꾼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였다.


그렇다면 소리꾼은 어떤 역할인가? 옛날에 책을 읽어주는 직업, 책비와 전기수가 있었다. 처음에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 판소리를 접하고 난 뒤 책비와 전기수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문맹인을 대상으로도 했겠지만, 확실히 혼자서 읽는 것보단 그게 더 재밌었을 것이다. 혼자 읽어도 되는 책을 굳이 엄마나 아빠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이유는 구연동화를 하듯이 재밌게 읽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리꾼은 여기에 두 가지를 더했다. 단순히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마치 살아있는 듯이 생생하게 전달했다. 배우가 독백 연기를 할 때 오로지 대사만으로 대본 중심의 인물 내면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집중을 한다면, 소리꾼은 이야기에 음악의 장단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내 귀엔 “↑→↓←↔↕↖↗↘↙←↑→↓↭↬↫↗↹⤣⤤⤻⤹⤳⤿⤽↶⥁↻⟳⇉⥏↾⥏⇵”처럼 들리는 것이다. 이건 고수의 북소리를 말하는게 아니다. 정말 그 소리꾼의 말엔 음악이 깔려있다. 비트도 없었는데! 사람 중에 별일 아닌 이야기도 참 재밌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흐름을 끊고 이어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어느 부분에는 힘을 줬다가 어느 부분에는 힘을 빼며 시간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다. 표정과 목소리도 마치 누군가를 흉내 내는데 그게 사실인 것처럼 생생했다.


내가 느끼기에 소리꾼은 그 정점에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영화가 100분 정도가 걸린다. 이 작품도 인터미션이 있었으니 110분이라고 해도 보통의 영화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긴 시간을 화려하고 계산된 연출이나 컷 장면 없이 오로지 소리꾼이 이끈다. 관객이 보는 건 소리꾼과 고수밖에 없다. 의상이라면 부채 정도? 이번 작품에서도 하얗게 떨어지는 조명과 극 후반에 풍기는 희미한 연기, 숲속에서 결말을 맞이하는 바실리를 표현하는 소리꾼의 그림자를 제외하곤 별다른 것이 없었다. 배우가 인물에 맞게 의상을 준비한다면, 소리꾼은 그런 의상도 없이 오로지 목소리와 연기력으로 승부했다. 아니 그게 소리꾼의 가장 큰 의상이자 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작위적이지도 않았다. 나에겐 그가 바실리, 니키타, 제티, 눈, 숲, 빨간 목도리, 늑대로 보였다. 그에게 세계 문학 전집을 다 읽어달라고 하면 세상에 문학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어려운 철학책도 그저 흥얼거리는 음악처럼 귓가에 들려올 것이다.


특히 소리꾼이 재밌는 이유는 여러 인물의 대사와 서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정말 애간장을 태우는데 능숙하기 때문인 것 같다. 감상을 하자면 책을 후루루룩 읽는데 거기서 인물들이 튀어나와 화르르륵 움직이는 느낌이다. 그의 시선 끝에 바실리가 사고 싶었던 광활한 숲이 보였고, 저 멀리 눈을 번뜩이는 늑대가 보였고, 어둡고 하얀 숲에서 펄럭이는 빨란 목도리가 보였고, 마을 입구에 음산하게 흔들리는 빨래들이 보였다. 푸르푸르 숨 쉬는 제티의 목소리와 눈, 눈, 눈이 내린 두려운 겨울 숲이 펼쳐졌다. 나는 따끈한 극장 내부에 있었지만, 어느새 체감온도 영하 80도의 러시아 숲이었고, 온 곳에 쑥쑥쑥이 보였던 바실리처럼 헛것이 보이며 결말에 혼연일체가 되었다. 판소리가 재밌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사만 이루어진 연기가 아니라 줄거리와 대사를 적절히 섞어 몸짓과 표정을 더하니 제 3자에서 청자로, 청자에서 고수로, 고수에서 소리꾼으로 변모했다. 나는 결말에 가선 그와 하나가 된 기분을 느꼈다. 이건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느 인물에 공감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사실 이건 직접 봐야 알 수 있다.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내가 봤던 소리꾼의 그 소리를 표현할 도리가 없다. 이야기를 완벽히 지배한 사람이 보여주는 감정은 나에게 날것 그대로 퍽퍽 다가왔다.


문학에 취약한 내가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을 읽었다면 이렇게 재밌게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흠 고집 센 주인, 결국 숲도 못 샀군. 이제 그 숲은 누가 살까? 이게 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판소리는 달랐다. 오 제티ㅠ제티는 대체 왜 무슨 죄로 죽어야 했나. 길을 찾은 죄? 너무 건강한 죄? 하필 눈에 든 죄? 그 추운 겨울에 산속에서ㅠ 바실리는 그놈의 숲, 날이 좀 좋아지면 가지. 4시간이 뭐 어때서. 마을에서 하루만 자면 뭐 어때서. 보드카나 마시면서 푹 잤다가 가면 좋았잖아! 각설탕이나 팍팍 먹으면서 홍차도 마셨으면 좋았잖아!! 근데 러시아는 차를 참 재밌게 마시네, 나도 그렇게 마셔봐야지~ 아니 근데 그 집 둘째 아들은 바실리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까? 파트르샤? 페트리샤? 그 사람이 얘기한 건 뭐였을까? 바실리도 못 들었고 나도 못 들었어. 그나저나 죽음이 그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줄까? 그런데 니키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다른 주인에게 가는 걸까? 니키타 그냥 돈 받아서 작은 땅이라도 사면 풀칠은 하겠지. 근데 돈을 줄까? 아우 러시아 겨울은 진짜 춥나 봐. 그래, 산은 어둠이 빨리 내려서 무섭다고 했어. 하지만 한편으론 신비롭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푹푹 잠기는 그 눈밭, 협곡에서 미끄러진 니키타가 느꼈을 공포ㅠ 그런데 그 쑥은 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쑥쑥쑥쑥? 그들에게 술이 있었다면 그날 밤새 버틸 수 있었을까. 보드카 좀 달라고 하지. 그나저나 그 젊은 숲 주인은 착하게 살았군......


정말 재밌는 영화를 봤을 때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는데, 이번 판소리도 똑같았다.아직도 그 무대와 누운~ 누운~ 누운~이 생각나고, 쑥쑥~쑥쑥쑥~이 생각나고, 쉬쉬쉬쉬쉬쉬쉬쉬~가 생각난다. 소리꾼의 이야기를 이끄는 힘찬 말과 시원한 목청이 생각나고, 그의 시선에서 보이는 풍경이 눈에 선하다. 고수의 소금 한 꼬집은 웃음이 나고, 그의 북소리에 심장이 쿵쿵쿵 뛴다. 왜 옛날에 마을마다 사물놀이패가 오면 구름같이 모여갔는지 이해가 간다. 왜 연예인을 보면 환호하고 좋아하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간다. 나는 그날 그들이 보여주는 생생한 이야기에 지쳤던 그날을 잠시 잊었다.


노래를 하나 추천하고 싶다. 작품과 전혀 안 어울리지만, 나에게 큰 재미와 감동, 요즘 느껴보지 못한 감정의 합일과 롤러코스터를 선사한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에게 딱 맞는 노래다. 아무리 불러도 와닿지 않았는데, 이제야 그 노래가 절절하게 이해가 간다. 싸이의 노래, ‘연예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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