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간디마을학교에서 3개월간의 해외이동학습으로 필리핀 Negros oriental 섬에서 보내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세부섬 바로 옆에 위치한 섬으로 두마게티라는 중심가에 공항이 있고, 세계 스쿠버다이버들의 성지라고도 하는 필리핀에서 네번째로 큰 섬이다.)
4계절이 뚜렷한,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IT 강대국인 한국에서 온 나는,
북괴뢰군도 두려워한다는 중학생 아이들과 함께, 느림의 미학을 실천할 수 밖에 없는 열대지방 필리핀에서 3개월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이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생존하며 즐기고 있는지 전지적 ‘나’시점에서 기록하고자 한다.
2023. 04. 25
“선생님, 이거 좀 보세요”
한 아이가 발을 베베 꼬며 번쩍 들어올려 발바닥을 보여준다.
“악, 깜짝이야!”
까맣다. 발바닥 전체가 숯검댕이라도 밟은 듯이 정말 까맣다.
찌는 듯한 더위에 조금이라도 더 노출이 되는 것들로 몸에 걸치다보니 늘 슬리퍼를 신고 다닌다. 지리산 자락의 갈전마을, 그 깊은 숲속마을까지 아스팔트가 깔린 대한민국인데, 전 세계에서 은퇴 이후 가장 살고싶은 도시로 몇 손가락안에 꼽힌다는 이곳은 아직 비포장 길들이 많고 게다가 그 길 위를 오토바이들이 끊임없이 쌩하니 달려간다. 차들마저 노출을 더하려 창문 없는 버스 jeepney, 창문 없는 택시 pedicab, 그리고 아예 뚜껑이 없는 오토바이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니 발바닥뿐 아니라 온 몸이 땀과 먼지, 매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잠시만 외출을 하고 와도 온 몸이 젖고, 온 발바닥이 완전히 까매진다.
그래서 아이들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그렇게 dog 좋았냐? 고 반문한다.
지난 주 토요일, 첫 주말을 맞이해 아이들은 설레고 설레는 마음으로 두마게티 PC 방으로 향했다. 그 어느때보다 일찍 일어나 꽃단장을 하고는 서둘러 나갔다. 낯선 곳으로의 외출이 전혀 두렵지 않다. 곧 우리는 게임의 세계로 빠져들테니까.
겨우 돌아돌아 찾아낸 첫 번째 PC방, 두 번째, 세 번째... 모두 불이 꺼져있다. 까맣게.
이런! 이 근방 대부분의 지역 또한 하루종일 정전이란다. 학교에서 20분가량 차를 타고 달려와야하는 중심가인 dumaguette은 12시간 정전이라는 학교와는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큰 건물이나 쇼핑몰 같은곳에서 자체 발전기를 돌리느라 도시만 더 뜨거워졌을 뿐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이 급 까매졌다. 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었나, 모든게 느리고 뜨거운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빠를 것 같았던, 유일하게 시원할 것 같았던 곳인데... 말이다.
jollibee에서 점심을 대충 떼운 아이들은 도저히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다. 시원한 쉐이크로 꼬드기는 선생님을 뿌리치고, 결국 다시 pedicab을 타고 깜깜한 학교로 향했다.
미안하고 또 안쓰러운 마음에 남은 여학생들만 데리고 boulevard로 갔다. 짙푸른 바다와 복잡한 도시를 이어주는 길게 늘어선 키 큰 야자수 나무, 시원한 바람, 다정한 필리피노들의 눈웃음 그리고 드문드문 자리잡은 좌판. 알록달록한 천 위에 포토카드를 늘어놓고 파는 곳에 제법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어 슬쩍 고개를 들이 밀어 보았더니... 우리나라 아이돌 사진이란다. 나는 모르는 아이들만 아는, 그놈이 그놈같은 그들의 사진 말이다. 난 알지도 못하는 그 놈들 때문에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작은 미소들이 모여 결국 아이들의 까만 얼굴에 서서히 꽃이 피기 시작했다. 재잘대는 아이들의 말소리, 웃음소리에 내 얼굴의 주름살 하나가 툭 떨어져 나가 가만히 꽃향기를 피워준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간 아이들의 분노는 어디로 어떻게 흐르고 있을까? 걱정스런 마음으로 들어선 운동장에는 놀라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웃통을 벗어 제끼고 맨발로 축구를 하고있는 아이들, 여학생들이 오니 살짝 수줍은지 뒤돌아 마구 뛰어간다. 그리고는 운동장 끝에 있는 작은 수영장으로 하나 둘 차례로 다이빙을 한다. 찐득한 땀에 젖은 나의 온 몸에 찬물을 끼엊은 기분이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고 선풍기 조차 돌아가지 않은 오늘이 가장 시원하고 즐거운 날이었단다.
이곳 아이들의 까만 얼굴에도 하얀 꽃이 피어 마구마구 향기를 흩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10대 아이들과의 삶은 늘 아슬아슬하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온 몸과 마음에 탱탱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아이들은 이제 나의 친구이다.
인생의 소중한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 언제든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친구라면 말이다.
이렇게 매일 매일 덥고, 또 그것이 무슨 대수냐는 듯 매일매일 땀흘리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이런곳이 지구상에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닐까?
굳이 와 본적은 없더라도 엄청난 미디어의 발전으로 결코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이 단지 우주인과의 만남을 상상하는 것과 그리 다를바없는, 있을수도 또 어쩌면 없을 수도 있는 세상 아니었을까?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하고 각오를 하고서 직접 몇백 마일을 날아와 이곳에 발을 딛이지 않았으면 우리 인생에는 없었을 이 곳.
더운 여름이면 빨리 시원해 졌으면 좋겠다 꿈꾸고, 추운 겨울이면 얼른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꿈꾸는, 늘 미래를 꿈꾸는 우리와,
오늘도 덥고, 내일도 덥고 앞으로 계속 더울테니 또다른 미래를 꿈꾸기보다 그저 오늘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이 있다.
발바닥이 까매졌는데 단수로 샤워도 못하고, 정전으로 세상까지 까매져도 아랑곳하지않고 참으로 여유롭고 오히려 더 즐거운이 곳.
나는 이 곳을 사랑하기로 했다.
딱 3개월간, 열렬하게!
목줄도 없는 커다란 개가 거리를 배회하다 내 옆을 지나간다.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다. 더위에 지친 축 늘어진 모습이 나를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