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소설가라니

- 이 글은 <아직 오지 않은 시_공현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by 완이

<아직 오지 않은 시>라는 책을 처음 보자마자 제목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즐기고 향유했던 문학 갈래이다. 더군다나 지금까지도 수많은 시집과 에세이가 베스트셀러로 등극 되며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데, 시가 아직 오지 않았다니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따라서 현대시론 서평 과제 도서로 <아직 오지 않은 시>를 선정하게 되었다.


책을 처음 펼쳐보고, 기계와 인공지능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오지 않은 시>라는 제목 때문에 문학적 감성을 담은 내용일 것이라 기대했던 탓인지, 뜬금없는 인공지능 이야기에 놀랐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부터 4차 산업 혁명과 인공지능, AI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기에, 이 책도 그러한 내용과 별반 다를 것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졌다. 솔직히 인공지능과 같은 과학 영역에 영 관심이 없던 나는 ‘뭐야, 이런 건 이과 친구들이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과학적이잖아.’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인공지능의 도래로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더 이상 인간이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현실이 나와 크게 상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인공지능은 창의를 요구하지 않는, 이를테면 운전과 같은 기계적인 단순 작업을 대체할 뿐이지 인간의 창의성이 필요한 문학과 예술의 영역은 인공지능에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다. 문학 작품을 창작한다는 일본의 로봇을 알게 되었고, 인공지능의 영역이 문학에까지 넓혀졌음에 무척이나 놀랐다. 국문학도로서 나와 직결되는 문학 영역에서의 위기감을 느끼며, 새삼 인공지능의 위대함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도 인공지능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과연 세상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소설을 쓰는 로봇의 등장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단편소설을 쓴다는 일본의 인공지능 로봇 이야기였다. 2016년 일본의 인공지능이 쓴 단편소설이 호시 신이치 문학상 1차 예심을 통과했다고 한다. 문학은 창작이 요구되는 학문이기에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로봇이, 인공지능이 어떻게 스스로 사유하고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문학 영역까지 이루어진 사실이 놀라웠고, 일본의 인공지능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 관련 기사를 더 찾아보았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일본 연구자들이 인공지능이 쓴 소설을 문학상에 응모하였다고 한다. 연구진이 주인공 남,여 설정 등 소설의 대략적인 구성을 담당하고, 인공지능이 단어와 형용사 등을 조합해 문장을 만들도록 하는 방법으로 소설을 창작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물론 상은 받지 못했지만, 이는 1차 심사를 통과하였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작가, 도노 스카사는 “이만한 작품이 나올 줄 몰랐다. 이야기를 잘 반죽해 넣으면 더 높은 전형을 통과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SF 작품을 쓰는 입장으로서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을 위한 소설을 쓰는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라고 평가한다고 전했다.


소설을 창작한 일본의 인공지능 이야기를 읽고 나서 한참 생각에 잠겼다. 인공지능의 단편소설이 문학상에서 1차 심사를 통과했다는 것은 이미 인공지능이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발전하였다는 증빙이다. 물론 인간의 깊은 고뇌와 고민이 담긴 시 등의 갈래보다는 비교적 서사 구조가 잡혀 있는 소설 갈래이기는 하다. 더욱이 인공지능이 스스로 이야기의 구성을 다 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잡은 틀을 그저 문장으로 구현하는 것에 그친 것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인공지능이 스스로 소재와 메시지를 생각하여 문학 작품을 창작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인공지능은 아직 부족하다.


문학 작품은 인간이 자기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창작하며, 잘 쓰인 문학은 읽는 이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그런데 과연 로봇이 창작한 문학 작품이 인간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까? 우리가 진심으로 공감하고 좋아할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 만약 인공지능이 문학을 창작한다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감정과 고민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데이터를 이용하여 쓰는 것일 것이다. 단순 모방과 표방이 과연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까?


소설은 도식이 있고, 서사에 구조가 존재하여 인공지능이 이를 학습하기 쉬울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창작한 소설은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미 도식화되고 양식화된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쉽게 질린다. 드라마도 뻔한 내용으로 흘러가 첫 화를 봤는데 결말까지 예상이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굳이 더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뻔한 이야기의 도식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창의성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에는 아직 그러한 창의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작품을 창작한다면, 그것은 단지 유명작가 혹은 유능한 작가의 글솜씨를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독자의 감정을 끌어내는 개성 있고 독창적인 작품보다는, 그저 베스트셀러의 이야기와 유행을 따라가는 수많은 글 중 하나가 될 확률이 높다. 분명 사유하는 인간이 만든 창작물과 로봇의 창작물 사이에는 깊은 질적 차이가 있을 것이다.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서, 인공지능이 스스로 사유하고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데까지 이른다면 그들의 작품은 과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책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인공지능의 작품을 읽고 독자들이 그것을 좋아하거나 감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인공지능의 창작물임이 밝혀지는 순간 작품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는 사라질 것이다. 예술 작품과 예술가는 별개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도 존재하지만, 우리가 예술을 감상할 때 예술가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름 모를 가수 또는 예술가로 활동한다면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작품을 향유할 때 무의식적으로 그 창작자를 떠올리고 영향을 받게 된다.


친일 시인보다 독립운동가의 시가 더 사랑받는 이유, 미투운동에 지목당한 작가나 감독의 작품은 사람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 이유, 인성 논란과 갑질 논란, 학교 폭력 논란에 휘말린 아이돌에 사람들이 예전과 같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유이다.


얼마 전 성균관대학교 축제에 공연 왔다는 싸이의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집에서 싸이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가 부모님께서 가수 유승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유승준은 가수와 영화배우로 인기를 끌다가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국적까지 포기했던 사람이다. 사실 나는 유승준이 가수였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뉴스에서나 그 사람의 소식을 접했지, 노래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논란 이후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어디에서도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싸이만큼이나 히트곡이 많았던 가수였다는 사실을 부모님께 듣고 정말 놀라웠다. 반면 싸이는 군대를 두 번 다녀온 연예인으로 유명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대중들에게 호감 이미지를 구축했던 덕분인지 지금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처럼 그의 노래가 얼마나 음악성이 좋았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와 관계없이 그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인성이 안 좋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노래를 피하고 아무도 찾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정말 좋아하고 즐겨듣던 노래라도 갑자기 매력 없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노래와 가수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듯이, 문학 작품과 그것을 창작한 작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문학성이 뛰어나고,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와 문체를 활용하여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지라도 그것이 만약 인공지능이 창작한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질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던 작품이 인공지능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독자는 자신이 느꼈던 감동이 허구라고 느낄 것이다. 문학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처럼 단순히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문학 창작가는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하며, 읽는 이들의 공감을 끌어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문학 영역에서 뛰어난 인공지능을 개발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까다로울 것으로 예측한다.


인간다움을 상실한 인간들


인공지능은 인간이 아니기에 더욱더 인간적인 것,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갖기 위해 발전한다. 인간적인 것을 성찰하고 사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의 의미는 정확히 무엇일까? ‘인간적이다’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인간적인 사람들일까?


나는 어쩌면 점점 인간적으로 발전하는 인공지능의 도래보다, 그와 반대로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있는 인간들이 더욱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의 발전 때문에 작가의 일자리가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시를 향유하지 않는 것이 인공지능보다 작가의 생계에 더 치명적일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현대인의 삶은 자그마한 핸드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종이책과 시집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현저히 적다.


각박하고 개인주의가 만연해진 요즘 사회에서는 시를 읽지 않거나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시를 읽더라도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을 상실한 독자들이 많다. 인공지능과 구별되던,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었던 감정과 공감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사람들은 긴 글을 보면 피곤해하고, 길거리에 위험해 처한 사람을 보면 모른 척 지나가며, 오직 개인의 이익과 효율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어쩌면 우리가 인공지능보다 더 ‘인공지능적’인 것이지 않을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시를 쓰는 인공지능이 도래하기 전에 이미 인간들에 의해 작가와 책, 그리고 문학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시 교육의 중요성, 시적 정의가 법과 제도, 정책의 모델이 되는 사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제고와 합의를 강조하는 작가의 의견에 동의한다. 수학과 과학의 계산, 선행 학습과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보다는 바쁜 일상 속 잠시 멈춰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 있고,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인성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기계적인 암기와 틀에 박힌 공부보다 아이들이 시를 향유하고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따뜻한 인간미가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잃어버린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인간과 인공지능,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


날이 갈수록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인간의 일자리가 인공 지능에 위협받는 것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나조차도 중고등학교 시절 자소서를 위해 꿈을 정할 때 직업의 미래 전망성 등을 고려하여 장래 희망을 정하고는 했다. 과학의 발전은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며,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공지능과 함께 생활하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인공지능 때문에 불안에 떨지만, 인간은 언젠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며 공존하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할 것이다. 주문받는 키오스크와 조리를 하는 요리사, 손님들에게 음식을 전달해주는 서빙 로봇이 함께 일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학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시를 쓰는 인공지능이 생기더라도,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상 작가는 여전히 작가이다. 책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쓰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한 여전히 쓰는 주체일 것이다. 그저 문장 생성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며 공존하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고, 문학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다만 기계는 마치 아이와 같다. 국제학술대회의 기조 강연에서 김대식 전문가는 인간의 편견을 기계가 학습하므로 기계를 통해 사회의 편견과 선입견이 더 증폭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기계는 우리 사회를 보고 배우며 자란다. 사회에서 학습하며 그들의 데이터를 쌓아나가는 것이다. 아이들도 자라난 환경에 따라 천사가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기계, 인공지능을 천사로 키우는 것도 바로 우리 인간의 몫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과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모두 열어 놓고 있다. 이제 그 열린 결말 속, 끝을 결정짓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2022년 봄 어느날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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