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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불로 벼려낸 검

다시 우리는 골리앗과 싸우러 가야한다

by abecekonyv

극단적인 경험은 인간을 자연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삶의 고난의 순기능이라는건 알아차리지 못했던 인생의 본질을 되돌려 놓는다는 것에 있다. 나는 아직도 본질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인간이 가진 가장 커다란 정열을 품고 살아가고 싶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운명론적 경험. 압도의 경험이다.


대서사의 결여. 이 시대는 개인의 시대이지, 운명의 시대가 아니다. 운명과 자유의지는 이렇게 보인다. 크게보면 운명이고 필연이자 작게보면 우연이고 자유의지 처럼 보인다. 우리는 모든것을 쪼개놓아 근시안적으로 변해버렸다. 자연 앞에선 인간은 무력화 된다. 반대로 개인 앞에선 인간은 오만해진다. 내가 가진 경험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일이 되는 건 오만함에서 나온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알아낼 수 없다. 그가 우리에게 설명을 해줄지라도 그냥 무용담이겠지 생각한다. 가짜인것 같으면 진짜라는 군대의 격언이 떠오른다. 개인의 삶을 남에게 증명할 수 는 없는것이다. 다만 우리는 무용담을 경멸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으면 무용담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시대의 혼란은 영웅호걸의 시대이다. 시대가 안정되면 순종이 덕목이지만 시대가 혼탁하면 순종은 목숨을 위협받는다. 삶이라는게 정해진 기준이 없다는게 명확히 드러나는게 이 때가 아닌가. 비도덕이 도덕이 되는 시기, 지금 처럼 안정적인 사회의 부도덕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살인도, 감금도, 폭행도, 강간도 이 시기에는 아마 정당화 되었을 것이다. 능력이자 힘의 시대이다.


극단적인 경험의 모순은 삶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극단적인 글쓰기는 극단적인 경험에서 나온다. 상상력은 한계가 있다. 풍부한 경험은 상상력과 같이 자란다. 우리에게 내면과 외부가 비대칭으로 비대해지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사상이 곧 그 사람의 행동의 필연적인 근거가 되어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균형의 수호자이다.


방탕과 도박에 빠졌던자가 쾌락의 무서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불능에 가까워진다. 사업가들의 말년이 비참하다는 이유는 젊었을적 수완좋은 시절의 환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에 있다. 노쇄한 육체를 이끌고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니 인생을 한탄하는 것이다. 사업가가 아니라도 우리는 조금만 더 젊었으면...이러고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가.


모든 위험함을 잘라버린 대가로 우리는 평이함을 얻어내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인 인생의 또 제한된 일부를 살아간다. 인생은 본래 스펙트럼이 더 크다는걸 약간의 통찰만으로도 얻어 낼 수 있다. 그러나 굳이 그것을 건드려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는 포경선을 굳이 탈일이 없다. 극단적인 빈곤으로 쓰러져가는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현재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과거의 빈곤이란 우리가 정말이지 상상 할 수가 없을 정도 인것 같다. 보릿고개, 전쟁에대한 무용담은 들어 볼 만하다. 그 시절이 얼마나 끔찍한지 들어 볼만 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노인에 대해 존중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경험이다.


현시대가 아무리 고통이라고 해도, 20세기, 19세기 가난의 극한을 마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왠만한 사람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해본 사람은 대단한 결과를 낼 수 있다.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비판받는 경험의 부재는 어찌보면 모순이자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경험을 양산해낼 필요는 없지만, 그것을 겪는 인간은 신과 가까워진다. 인류의 모든 종교적, 철학적, 인류사적 거대한 통찰은 이런 극단적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전쟁을 겪지 않았기에 전쟁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운명이니 자유의지니 싸우는 것도 자연의 웅대함을 바라보면 한 순간에 무력화 된다. 우리는 병자 신세가 되어서야 인생을 돌아본다. 지금까지 잘못산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 한다. 운명론을 받아들이고 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비겁함이자 오만함이다. 비교한다는 것은 그 속성의 비등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압도적으로 큰 우주앞에 우리는 비교를 상실한다. 무릎 꿇고 복종한다. 이 페티시즘적 쾌락이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장엄함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생각하는가. 삶에 치여 우리는 그런것은 망각한지 오래되었다. 앞의 일들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공상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효율화 하였기에 시간을 어떻게든 빡빡하게 밀어넣어 미시적인 일들을 처리하는데에 급급할 뿐이다. 우리는 멍 때리지 않는다. 우리에겐 신이 없다. 신을 생각할 여유는 일요일이나 토요일에만 허락 된다.


삶이 피폐해질때 다시 인생을 바로잡는 것은 내가 그것을 극복해본 경험이다. 그리고 아직 극복해보지 못한 경험에 대해서도 내가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희망은 역설적으로 거대함에 무릎꿇고 복종하는 것에서 나온다. 우리는 우주의 스케일을 가늠 할 수 없다. 은하의 크기는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다. 우리는 은하를 안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이 지구를 안다고도 이야기 할 수 없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서사를 배우기 위함이 아닐까? 우리는 결여 된 시대에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거대 서사를 다시 한번 읽어야 한다. 삶의 고민이 티끌같이 변해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용기를 얻는다. 우리는 골리앗과 싸워봐야 한다. 우리의 인생은 한 사람 모두가 다윗이기에.


공감을 말하는 자는 공감 할 수 없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믿음은 어찌보면 극단성이다. 중립적이고 허무맹랑한 그런것이 아니다. 신뢰는 불로 벼린 칼과 같다. 신뢰야 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첨예한 무기이다. 기도를 할 수 있는자가 인생을 살게한다. 의례와 기도가 거대함을 맞서는 예비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대한 자연 앞에 기우제를 지낸다. 그것이 아무 효과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의 인생은 이런 거대한 무의 공포와 싸워 이겨내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실체없는 공포이다. 은하는 비어있다. 구상성단은 비어있다. 우주는 비어있다. 우리의 내면도 비어있다. 단지 우리는 피안의 허무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허무의 골리앗. 우리는 허무의 거인과 인생을건 일기토를 하는 것이다. 죽도록 싸워도 이길 수 없는건 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을 살게하는 아이러니를 가진다.


믿을 수 있는 용기만이 인생을 살게 한다. 믿음이라는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우린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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