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곡선론

돌출의 메커니즘

by abecekonyv

우리는 통조림캔 같은 인생을 바란다. 무언가로 내실이 꽉꽉 차있는 인생말이다. 그러나 누구나 느끼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환상에 가깝다는 걸 예감한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든 이미 우리는 시간적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의 행동을 구분하자. 자신이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즉 사회적인 행동, 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개념적으로 행동인 자연적인 행동이 있다. 우리에겐 망각이 필요하다. 앞으로 할 일에 대한 망각이 필요하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부유하고 있기에 그것을 잡아 낼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망각은 돌출을 뜻한다. 의식을 포기함으로써 한 곳으로의 집중이다. 그 망각은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연에 의한 취사선택 과정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망각된 것은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망각된 것은 우리에게 의존해 있지 않다. 그것의 거처는 정해져 있지 않다.... 망각은 비상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다. - 벤야민과 기억 윤미애역 중 <카프카 관련 수기들> 선집 7 (벤야민) 발췌


기억의 흔적들은 그들을 남게 한 과정이 의식화된 적이 없을 때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영속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극의 영구적 흔적들은 '지각-의식'의 조직에는 남아 있지 않다. - 벤야민과 기억 윤미애역 중 프로이트의 글 발췌


돌출이란 집중을 뜻한다. 백화점의 공간은 돌출을 위한 예비 공간이다. 상품의 돋보임, 직원의 돋보임, 그리고 행인의 돋보임을 연출한다. 백화점 속을 거니는 예쁜 여자의 선은 평소보다 더 돋보인다. 직선과 단조로움의 공간. 미니멀리즘의 극대화는 곡선을 이질화시킨다. 아우라는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신경이 한 곳으로 모인다면 우리는 돌출됨을 느낀다. 사각형 유리안에 디스플레이, 지갑들의 향연, 심지어 냄새까지 돌출시킨다. 무색무취는 향을 돋보이게 한다. 백화점의 무색무취는 오감의 연극을 위한 무대이자 장치이다.


직선의 도시에서 곡선의 돔 구조는 무거움을 가진다. 시공간 평면 위의 높은 질량의 항성처럼 평지 위의 구형 건물은 우리에게 중력감을 선사한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어떠한 돌출감은 우리에게 날카롭게 다가온다. 이곳은 범상한 곳이 아니라는, 항상 함 보다는 일시적인 쾌락과 같은 시각적 자극을 선사한다.


우리의 시각의 메커니즘은 집중과 선택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그리고 과학적으로도 우리의 시신경은 모든 걸 포착하긴 힘들어 보인다. 우리는 집중을 통해 바라본다. 다른 시신경을 비교적 약화시킴으로써 우리는 돌출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것이 아주 평범한 일상이기도 하다. 돌출은 범상하지 않은 것이지만, 우리의 일상 속 메커니즘이기에 범상하기도 하다. 우리는 돌출로서 바라본다. 우리의 존재는 그 이전에 이미 공간 속에 돌출되어 있다.


한 곳으로의 집중은 우리의 생리적 메커니즘이다. 우리는 우선순위를 선별하여 집중한다. 공간을 휘게 만든다. 사실은 공간이 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의 메커니즘에서 곡률을 재생산한다.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파악의 형식이 곡률을 연산하는 것이다. 우리는 직선보다는 곡선으로서 바라본다.


우리는 점을 인식한다. 점은 수학적으로 열린 공으로 볼 수 있다. 위상수학적인 변형은 이 공을 찌그러뜨리고 펼치기도 한다. 우리는 태초부터, 가장 근본적인 형식으로서 곡선을 인식하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인위적인 것은 직선일지도. 직선은 곡선의 추상화인지도 모른다. 직선은 생각해 보면 특수한 경우이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곡선을 이질적으로 느끼게 되었을까? 사실 내가 이야기하는 것들은 항상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가장 단순하다고 여겨지는 선인 직선은 우리에게 특수한 경우이다. 우리는 어떻게 직선에 친숙해지게 되었나?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추상화된다. 이미 우리의 태어남 이전에 선조들은 직선을 낳아버렸다. 우리는 개념적인 선의 포착만이 있을 뿐. 내용과 구체성, 중력을 상실해 버렸다.


신은 부재의 형태로만 창조 속에 존재한다. -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빈 공간은 그 자체로 돌출이다. 특히나 과잉된 지금의 시대에선 공간이야 말로 쾌락이자 돌출이다. 우리는 튀어나온 것. 발기한 것을 쾌락으로 인식한다. 빈 공간은 과잉된 시대의 블랙홀 같다. 빔 그 자체는 주위의 과잉을 빨아들인다. 빔의 중력은 과잉을 휘게 만든다. 마치 그것이 과잉이라는 속성을 더욱 증대시키는 것 같이 보인다. 과잉된 것을 가속시켜 버려 자신이 마치 더욱더 강렬한 존재임을 보여주려는 듯한 매혹을 느끼게 만든다.

우리는 과거 이 블랙홀을 지나 현대라는 화이트홀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넘실댔던 곡선들의 세상이 아니라, 단조롭고 추상적이 직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비가역적인 우주에서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 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 공간의 휨은 시간을 가속한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직선의 세계로 정착하게 되었다.


헬레니즘적 관능은 이 시대엔 너무나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바로크를 경유하며 곡선을 혐오하게 되었고, 절대적 추상의 시대로, 연산이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본래 돌출됨을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망각이 다시 돌출이라는 앞의 문단에서 주지하다시피 다시 곡선의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새로운 곡선의 시대일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믿음은 불로 벼려낸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