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가 곧 삶이다
잠을 자는 저녁마다 우리를 괴롭히는 유령이 있다. 실수라는 유령, 시행 착오라는 명목하에 우리의 일상을 분산시키는 악마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 사탄의 망령이 덧씌워져 신경질을 내게 된다. 잠을 설치게 된다. 겨우 망각한 줄 알았지만 우리가 약해질는 순간 틈을 비집고 얼굴을 들이밀며 말한다. 너는 그때 병신같은 짓을 했어. 애써 무시하고 자려하지만 우리는 잊지못하고 잠을 설치게 될지도 모른다.
실수는 아쉽게도 영원히 망각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이 삶의 과제에 신경을 쓰게 놔둘 때 잠시 기세가 약해질 뿐, 우리의 사탄은 죽지않는다. 우리가 약해질 때 크게 부활한다.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불타오르며 우리에게 빠간 삼지창을 들이밀며 심판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불을 걷어차며 악마로 부터 벗어나길 시도한다. 그러나 악마의 기세에 익숙 해 질뿐 우리는 달아나지 못한다.
우리의 의식이 약해질 때 무의식은 균열을 이용해 쳐부수고 돌진한다. 뇌의 시신경이 쉬고있을 때, 갑자기 피어오르는 악마의 자극이 우리의 전 신경을 자극한다. 전기 신호가 전신을 휘감게 될 때 우리는 이불을 걷어차게 된다. 우리는 바보라서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이라는게 실수를 잊지 못하도록 설계가 되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정을 바라보는 것에 최적화된 생존 기계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고통의 자기 분열이라는 지젝의 말이 떠오른다. 지젝의 말대로 우리의 고통은 역사 속에서 하나하나의 실수, 부정, 고통 등을 우리의 생리 하나하나에 바로 새기며 나아가는것이다. 우리의 일생은 고통으로써 긍정을 얻는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이 일은 이렇게 하면 안되 등등 우리의 판단 근거가 되어준다. 놀랍게도 우리를 괴롭혔던 피로한 밤의 악마들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간다. 삼지창이 우리를 겨누며 죄의 심판을 요구 할 때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도 듣는다. 이 악마는 재판을 멈추지 않고 나아가며 죄의 뉘우침을 요구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실수를 다그치면서 나아간다. 그러나 잠시 망각 할 뿐 언젠가 다시 한번 부활하여 우리에게 재심판을 요구한다.
우리는 악마에게 빌게 된다. 제발 나의 꿈속에 그만 나오라고. 이미 그 죗값은 치뤄냈다고. 과거의 끝난 일을 더 이상 캐묻고 들추지 말라고 절규한다. 악마에겐 당연히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이다. 우리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망각의 축복을 누렸으면 다시 죄의 심판을 받을 때이다. 너는 다시 시시포스의 삶 처럼 무거운 쇳바위를 밀고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남에게 얼마나 너그러울 수 있을까? 우리는 원죄에 해당하는 치뤄 낼 수 밖에 없는 태생의 죗값을 짊어지며 살아간다. 실수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삶의 죄인이다. 타인의 잘못을 보며 우리는 우월감에 빠진다. 그들에게 상처를 받음과 동시에 나는 저러지 않을 것이다. 혹은 그러지 않는다. 라는 미혹에 빠진다. 미혹이 아니라 사실은 치명적인 오만이다. 오만은 인간을 알게모르게 지옥끝까지 타락시킨다. 우리를 심판하는 밤의 악마의 죄명 리스트에 우리의 잘못만 깊어질 뿐이다. 타인에게 관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적어도 당신이 깊은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우리는 더 큰 시련을 겪어내야 한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깊은 양심의 느낌을 가진 사람이라면 큰 죗값을 가지기도 한다. 우리의 삶의 죄를 짊어져 본 사람만이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인가? 아마 인간의 오만함이 적게 죄를 짊어지고 타인에게 극한으로 너그러울 수 있는 신의 재능을 제한두고 있는지도 모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오만하다. 여기저기 오만의 꽃을 불시에 피어난다. 우리가 오만이라고 인식하지도 않는사이에 오만은 잡초같이 생장한다.
인류의 격언은 오만에 대한 경계를 항상 후대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만이라는게 인간의 본질이라도 되는 것인지, 몇 천년의 인간 역사에서 오만은 불식되기는 커녕 더욱 증대되기에 이르른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편적인 타인의 세계를 보고 쉽게 비판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당하는 것을 멀리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우리는 깨닫지 못하면서 죽을 떄가 되어서, 혹은 죽을 때가 되어서도 못 깨닫는지도 모른다.
절대적으로 뛰어난 인간은 없다. 그것이 있었으면 좋겠는지도 모르는게 인간인 것 같다. 우리는 그런 상상의 존재를 경멸하고 질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존재의 도래를 간절히 기도한다. 타인의 완벽은 우리의 희망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거기에 도달 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시켜주는 미륵불, 메시아가 우리 인생에 도래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질투는 인류의 불완전성을 상징한다. 완전한 존재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기우제가 우리의 손에 박히 유리 파편 처럼 내재해 있다.
질투가 곧 기도이다. 질투는 나의 불완전함을 고백하고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소망의 기도이다. 우리의 삶이 더 나아기고자 하는 열망이기도 하다. 우리가 석양이 질 때 우리의 하루를 정리 하듯이 질투를 할 때 우리는 나의 오만을 정리하게 된다. 내가 본질적으로 잘난 인간이 아니었음을 예감하고 깊숙한 동굴로 돌아가 잠을 청해야 하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성장과 결과를 보며 질투하는 것은 곧 기도이다. 그러나 그 기도는 부정의 측면을 띠게 된다. 우리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의 불완전함을 고백하는것이 어떻게 긍정적이라고 보겠는가? 우리의 삶을 기준으로 보았을때 기도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기도가 가지는 힘은 우리가 변증법을 보듯이, 우리가 부정으로 더 나아간 긍정을 바라는 것에 있다.
깊이 보지 않는 재능이 중요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깊이 볼 수 있는 자만이 깊이 보지 않을 수 있다. 심연에 대한 점근적인 후회를 몸소 느낄 때 멈춤을 가질 수 있다. 무한히 나가가도 도달 할 수 없는 점을 보듯이 우리는 어느 순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이 성숙하고 농익을 때 까지 우리는 심연을 향해 달려봐야 한다. 심연은 우리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뱉어낸다. 우리가 뱉어내어 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