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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해 생각하는게 가장 어렵다

삶의 변방에 서서

by abecekonyv

인생에 대해 생각하기가 최고의 어려움이 아닐까. 우리는 간단한 대답에 대해 애써 돌아가려한다. 그것은 순진한 생각인것 같다는 자기 검열 때문에, 우리는 단선적인 길을 포기하고 풍성함을 택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무것도 읽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생에 대해 통찰 할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항상 지름길이 아니라 일반 국도의 노선을 취하게 된다. 하나의 길을 포기한다는 것은 다른 길에 대한 희망과 아쉬움을 내포한다. 가능성에 대해 잃는 것을 우리는 극도로 싫어하기에 둘을 모두 잡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나의 길을 택하는 것이 오히려 반대의 길까지 포함하는 것이었음을 깨닫는건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톨스토이의 소설은 솔직함에서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열여덟살 때 부활을 처음 접했을 때가 있었다. 내가 그에게 느낀 진솔함이라는 것은 삶에 대한 진솔함이다. 행동으로 그것이 옮겨지지 않더라도 예감의 차원에서 그것을 솔직하게 느낀다는 것은 모든 일의 시발점이다. 그것을 직감하는것 만으로도 우리의 행동은 조금이나마 변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솔직함은 내 인생에 대해 기만하지 않겠다는 용기이다. 귀족적인 방탕함과 진솔하지 못한 문화의 화려함과 장식성에 치중하는게 곧 허무를 낳는다는 걸 그는 일찍이 깨달은 듯 싶다. 사실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가 인생에 대해 얼마나 솔직하고 싶었는지는 그의 글을 보면 느껴진다.


자잘한 일에 신경쓰다보면 큰 줄기를 놓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자잘한 것들에 머물게 된다. 한발짝 빼서 생각해보는 여유가 없는 삶이다. 우리는 쉴 때 조차도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생에 대해 고찰해보기 쉽지가 않다. 사실 이 세상에 뭘 해야한다는게 없는건 분명할지라도, 우리는 문화라는 허상과 씨름하여 허무를 낳게 된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은 문화와의 싸움에서 얻어진다. 문화라는건 우리에게 마땅한 법적이고 사회적인 당위성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진실하게 생각해본다면 우리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한다는게 결코 없다는걸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그런대로 버젓한 관료 귀족 출신 남작인데다 주정부에서 근무하는 이 젊은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짧은 휴가를 낸 것은, 모든 동료가 한 주간 봄 휴가를 떠난 마당에 혼자서 공무 처리를 하느라 휴가를 헌납하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젊은이는 내면을 성찰하는 능력이 없지는 않으나, 무척 사교적인 천성으로 인기를 모으고 어떤 모임에서든 환영받는 사람으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오롯이 자신만을 대면하는 성향이 아예 없는데다, 자기 자신을 더욱 속속들이 알고 싶은 마음이라곤 없었기에 되도록 자신과의 만남을 피했다. - <불타는 비밀> 슈테판 츠바이크 황종민 역

우리는 삶에 문화라는 주(註)를 달기 시작하면서 괴로워진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를 가능하게 하기에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굽이치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우리는 살아가다가 귀소본능을 체험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이론을 대더라도 결국은 간단하도 쉬운 결론으로 도달한다. 그것이 과학일 지라도 결론은 간명하다. 그 과정을 함이 사실 학문의 본질일 테지만, 역설적으로 학문이라는걸 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 근시안적으로 변해버린것이다. 수학에서는 국소적인 성질이 대역적인 성질로 얼마나 확장 될 수 있는지를 따진다. 우리는 학문이라는 선글라스를 끼고있는것이다. 우리는 삶이라는 태양을 눈부셔하기에 빛을 차단하고 싶어한다. 그것을 바라보는게 백사장의 양광같이 고통스럽기에 우리는 바라보길 거부하는지도 모른다.


인생을 성찰한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진 않다. 각자의 인생론이 존재한다. 그것이 인생의 본질에 대한 각론이자 변주일진 몰라도 우리는 나름대로 인생을 보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학문을 하는자의 가장 큰 맹점은 그 각론들을 나이브하다고 바라보는 것에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직관을 증명하는 수단에 불과한 학문이 마치 인생에 해답이라도 되는냥 바라보는것이다. 우리는 이런 오만함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인생의 본질이 있다. 우리의 인생은 태어남과 동시에 끝나버렸기도하다. 우리에게 더 이상의 명령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든 간에 생명의 지장만 없다면 무엇이든 허용된다. 이 깊은 허무의 굴 속에서 우리는 자생할 수 있을까? 이 자족의 능력이야 말로 인생을 살게하는 근본적인 것이다.


가끔은 바보가 되어보는게 어떤지. 삶의 수단들에 대한 조소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수단이 목적이 되는것이 빈번한 우리 삶이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가끔 우습다는 눈초리로 꿰어봐야한다. 그것이 가소롭다는 생각으로 경멸해야한다. 아주 극미량의 음식과 물로도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최소한의 것들로 많은 것을 얻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약간의 인생에서의 실험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을것이다.


우리 삶의 형식이 너무 일찍 허무로 다가와버렸다. 미니멀리즘이 넘쳐나는 시대이기에 우리의 삶이 너무 빠르게 허무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버린것이 아닐까? 단조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단조로움의 반대 항인 곡선을 찾는지도 모른다. 선후관계가 바뀐것을 망각한채 우리는 풍성한 것들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다시 미니멀리즘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걸 예감하기 시작한다. 풍성함이 우리의 생리 메카니즘이 아니기에 우리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다. 문화가 이 시대에 풍성하지 않기에, 귀족의 문화는 과거의 산물이라 촌스럽게 여기기에, 일찍이 단조로움을 포기해 버린것이다.


모노톤의 시대이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나 일찍 버리는 시대이기도하다. 과거에는 늙은이의 취향인 것들이 너무 빨리 젊은이의 것으로 변모해 버렸다. 우리는 무색무취를 좋아하면서도 금방 실증낸다. 마치 개념미술을 보듯이, 고전적인 회화의 관능성을 탐해가는 쪽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그런 풍성함을 잊어버린 시대에 태어났기에 젊음을 잃어버린 후에야 단조로움을 다시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어렸을 때부터 접하는것. 공자와 맹자, 중국과 해외의 귀족사상을 일찍이 접하는 것은 과거의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선조들의 유년을 풍성하게 했기에 그들은 깊은 추상성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추상성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풍성함을 잃었기에 그것을 감내하는 능력을 배우지도 못하였다. 구체서이 비어버린 개념의 시대. 우리는 빈 공간에서 환원주의적으로 내려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다.


추상이 넘치는 시기이기에 추상을 배울수 없다는 아이러니. 우리는 역설적인 시대에 살고있다. 인생에 대한 추상이 아니라, 구체성이 빈 추상을 일찍이 접했기에 우리는 인생에 대해 계속 이리저리 피해간다. 솔직하지 못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인생에 대해 생각하기 가장 어렵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태생이 그것보다 해상도가 낮은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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