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점(zero point)를 바라보기
0 = {} = Ø,
1 = {0} = {Ø},
2 = {0, 1} = {Ø, {Ø}},
3 = {0, 1, 2} = {Ø, {Ø},{Ø,{Ø}}},....
집합론적 자연수의 정의
어느 날인가, 나는, 대양에,
(그러나 어느 하늘 아래선지 모르겠다)
던졌다, 허무에 진상하듯,
귀중한 포두주 몇 방울을......
누가 너의 유실을 원했는가, 오 달콤한 술이여?
내 필시 점쟁이의 말을 따른 것인가?
아니면 술을 따를 때 피를 생각하는,
내 마음의 시름을 쫓았던가?
장밋빛 연무(煙霧)가 피어오른 뒤,
언제나 변함없는 그투명성이
그토록 청정한 바다에 다시 다다른다......
그 포도주는 사라지고, 물결은 취해 일렁인다!......
나는 보았다 쓸쓸한 허공 속에서
끝없이 오묘한 형상들이 뛰어오르는 것을......
폴 발레리(Paul Valery) Le vin perdu 잃어버린 포도주 김현 역
우리가 무(無)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상기해보자. 진실로 우리는 무한의 증대성만을 생각하지 무한소에 대해 얼마나 생각을 해보았는지. 무한히 작아진다는게 무한한 양을 생산한다는 것임을 우리는 약간의 통찰로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0의 글쓰기. 영점의 글쓰기에 대해 프랑스 작가들이 이야기 했던것 처럼. 우리의 도처에는 0이라는 망령이 존재한다. 그것은 모든 것의 모체가 되어 임신하고 출산한다. 카프카가 말해주듯이 우리는 그 망각이자 생성의 어머니인 무의 개념에서 모든 것을 뱉어낸다.
0이 사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논의 할 필요가 있다. 아마 우리의 개념적인 인식에만 존재하는 수가 아닌가 하고. 0을 아무것도 새지 않음이라고 정의 한다면 그것은 개념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손가락 하나를 말할 때 그 대상이 직접적이고 실증적이다. 우리에게 0은 친숙하지만 바라볼 수 없다. 그러나 0의 존재가 수학의 세계에서 사라진다면 우리의 인식 체계가 무너진다. 0이라는게 모든 것을 생성하는 것임을. 그리고 역설적으로 부정방정식의 모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0)에서 수 많은 양을 잉태 할 수 있다. 엄밀하지 못한 비유적인 표현 일 수 있겠지만, 우리의 직관이 거기에 있다. 허무를 응시하는 것은 신을 응시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이다. 입장되지 않는 세계이자 도달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투쟁은 우리의 인생을 모두 소진시킬 지라도 불가능한 꿈과 같은 일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신의 세계를 보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의 파편화된 조각들은 꿈에 현상되어 나타난다. 우리의 조각들을 조합하여 비선형적인 결과를 잉태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꿈이 가진 직관이자 도구로서의 꿈이지 않을까?
가장 작은 것을 취함으로써 큰 것을 얻는 것.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공수래 공수거의 지혜는 공수래 만(萬)수거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영도는 개념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에 내재한 근본적인 성질인지도 모른다.
글쓰기의 직전 우리는 백지를 마주한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백지는 모든 글에 대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영도의 글쓰기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오 나의 영혼이여, 영원한 삶을 갈망하지 말고 온 가능성의 영역을 샅샅이 규명하라.
핀다로스, 델포이의 축승가(祝勝歌)
중립은 모호함을 낳는다. 그러나 그것은 속세의 중립의 일이다. 이상적인 중립은 완전히 양극에서 벗어난 것으로써 개념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속세의 모호함이 모든 것을 생성하는 것임을!
우리는 진실로 자연을 마주하는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블랙홀의 존재는 영점의, 특이점의 강력하고도 온화함을 말한다. 특이점은 어머니의 품 처럼 모든 것을 품어낸다. 모든 것을 차별없이 빨아들인다. 원뿔 곡선의 미분 가능하지 않는 특이점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것은 무한한 탄젠트 스페이스, 무한한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해보자. 시라는게 애써 쓰려고한다고 해서 나오는게 아닌 듯 하다. 필연적인 영감의 존재가 극단적인 천재론을 말하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영감에 대해 부정 할 수 없다. 글을 쓴다는 것도 영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아니어도 우리는 글을 쓴다. 사실 천재라는건 존재지 않는 말에 가깝다.
영감은 무의 세계에서 나오는 듯 하다. 그 속의 빨려들어간 파편들이 다시금 뱉어낼때, 랜덤으로 무작위 추출로서 영감의 출산이 일어난다. 우리는 태허(太虛)애서 모든 것을 쏟아낸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들이 튀어나온다. 마치 도라에몽의 사차원 주머니를 보는것 같이. 우리는 무한한 영역을 허무로서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시의 창작은 그러므로 빠르게 진행된다. 영감이 잉태되고 나오는 과정은 빠를 수 밖에 없다. 그 영점의 압축의 반향으로 뱉어냄 역시 빠르다. 시는 매우 빠르다. 빠른 만큼 강렬하기도 하다. 상징의 시어는 만들어내는게 아니라 뱉어지는 것이다. 상징은 이미 잉태된 것들을 출산하는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를 응시한다는게 무엇을 말하는건지. 그냥 막연하게 벽보고 앉아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유령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유령의 세계는 꿈의 세계이다. 우리의 부분집합의 세계이자 기저공간. 그곳에서 파편화된 모든 것들이 생식하고 새로 태어난다. 우리는 정신의 공간을 마주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