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주의적 글쓰기의 시론
안전함은 아마 세상에서 특수한 경우에 속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외부의 경계를 받아서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시대가 모든 위험을 잘라버려서 우리는 미연의 위험에 대한 생각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상력이라는건 원시시대의 포식자들을 일찍 알아차리기 위함이라는 이론이 떠오른다. 상상력에 종언이 내려전 시대에 괴물의 출현은 용인되지 않는다. 상상력은 괴물의 영역에 속한다. 이리저리 조합해보고 이상한 것이 튀어나온다. 뱀의 머리를 가진 곰이라던지, 사자의 갈기를가진 토끼머리의 곰이라던지 말이다. 우리의 창의력이라는것은 그렇게 대단한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경험의 조작이자 파편화된 랜덤 조합일지도 모른다. 상상력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도달 할 수 없는것이라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위험을 바라보지 않는다. 인간의 안전한 삶만을 유지시키는 능력만이 극대화 되었다. 우리에겐 요람에서 부터 그것을 마주하는 재능을 가질 수 없게되었다. 부모도 선조도 우리에게 위험에 맞서는 능력을 키워주지 않는다. 공교육을 20살이 될 때까지 받으면 된다. 우리에겐 극심한 가난도 자연재해도 미연에 방지되고 심지어 뉴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놀이터 역시도 아이들에게 위험하다고 허용되지 않는다.
위험하게 살라는 말도 아닐뿐더러 이미 위험하게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통은 점진적인 증대가 필요한 법이다. 갑자기 극심한 고통을 주입하면 사망에 이르는 것 처럼 신경계가 버틸만한 탄탄한 재목을 기르는 시간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것이 상실되어서 우리는 신경계의 허약함을 느낀다. 노인의 팔뚝이 오히려 두꺼운 경우가 있다. 그것은 과거의 고단함과 위험을 상징하는 듯 하다. 우리에겐 그런게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까지 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하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마주하지 않는다.
가끔은 펭귄밀크 같은 허약함을 마주한다. 세대가 거듭 될 수록 젊은 세대들은 유약해보이기 마련이라 할 지라도, 성인의 기준이 좀 모호해보인다. 과연 어른들은 갓 20살 된 애들을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성인식에 대해 생각해보면 합당한 고통과 책임을 짊어지라는 메세지를 심어준다. 일부러 지옥개미에 물리거나 하는 그런거 말이다. 스물이 되어도 대부분은 법적인 성인이지 어른들이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하는것 같다. 그리고 그게 이런면에서 맞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성인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십대 삼십대도 아직을 어리다는 말을 보면 시대가 유아 퇴행적이라고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본질적으로 성인의 기준이 애매할진 몰라도, 자신이 어른이라는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암시하는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끔직하다. 우리는 항상 위험을 회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주보지 않음으로서 언제까지 도망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안되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말을 아직도 쓰고 싶은것인지 그것을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것이다.
타인이 성인이라고 인정을 안해줄 지라도 자신은 성인이라고 인식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는것 같다. 그것이 결여된 이 시대의 생존법이 아닐까? 사려 깊음을 오히려 버려보는게 어떨까. 모든 효율을 따지기 시작하니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덕목 역시 중요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우리는 무해함을 사랑한다. 어머니의 품을 사랑한다. 그러나 무해함이라는게 언제 쓰임이 중요한지를 바라보자. 웅대한 모험의 마지막에서 쉬게 되는 안락함이 그것을 확실하게 만든다. 어머니의 품이라는건 위험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해함이라는건 위험을 이미 선행한 이후의 일이 아닐까? 이 시대가 얼마나 특수한 경우에 놓여있는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무해함이라는게 도리어 후대의 위험이라는걸 자각 할 수 있을것이다.
오히려 이 무해함의 역설이 기회임을 알아차리자. 우리는 적어도 적정선 내에 리스크를 쥐고 죽거나 할 필요는 없다. 상황이 괜찮다면 어디든 돌아갈 안락함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곳에만 천착하지 말고 위험한 곳에 나아가보는 것이 중요하다. 미래는 우리에게 항상 포식자와 같다. 그것이 우리를 삼키고 소화시키기 이전에 우리는 칼을 갈고 총을 장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