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닌지도 모른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러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윌리엄 워즈워스 유종호 역
성실함은 이 시대에 과소평가 되었다. 적어도 내가 말하는 성실함이란 자연을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이란 적어도 인간의 문화에 구애받지 않는 본연적인 태생의 것을 의미한다. 내가 가진 것들은 문화에 의해 제어당한다. 지금의 성실함이란 아마 누군가의 지시를 효율적이고 다산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그침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을 응시하는 성실함이란 자신의 삶에 대해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내면의 몇 가지 공리들을 변형시켜 자연을 비선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자연을 재발견하는 것만이 우리의 창의성이자 허용된 한계이기도하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꿈을 꾼다. 그것을 꿈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각자의 내면의 공리들에 맞춰져서 세상이라는게 우리에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자연은 은폐되어 있다. 그 장막의 정체는 인간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여지는 자연은 철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강도가 다르다. 측정도구의 종류에 따라 우리는 물리적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달라진다. 고성능 현미경으로 우리는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기술이 인간의 한계이자 자연을 역설적으로 은폐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연을 응시 할 때 새로움이 없는 이유는 문화로 대체해서 그렇다. 우리는 자연을 바라 볼 인내력이 없다. 문화라는 것이 자연을 재발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인간들은 문화에 절여져서 나아가지 못한다. 문화를 창출한다는 것은 그 만큼 자연을 가리는 것이기도 해서, 우리가 직접 자연을 찾으러 나아가야 한다.
문화에 대한 성실함이 증대 되었다. 그것은 비어있는 공간으로의 극한의 달리기이다. 좁은 곳으로 나아갈 수록 경직되고 속도는 가속된다. 약간의 방향이 틀어진다면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성실하다는 것은 현대에 이런식으로 작용한다. 성실의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어 성실이 흔해져버렸다. 누구도 성실하다고 명예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기본값이기 때문에. 양적으로 대상화 시킨 이후에서야 성실함은 그 가치를 잃어버렸다.
성실을 가중하는 것은 종교이다. 종교적인 마음가짐으로, 신실한 소녀의 마음가짐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문화를 종교화하였다. 자연을 응시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의 도구를 숭상하게 되었다. 기술을 숭상하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바라면서.
나아가기 위해서 자연을 다시 돌아볼 줄 아는 미덕을 지니는라는게 얼마나 순진하게 들리는지. 그렇기에 우리는 애써 무시한다. 삶을 재발견 할 용기를 잃어버렸다.
모든 가르침은 간단하다. 단지 우리가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이다. 황금률에는 지키지 못하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키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흔해진다. 성실은 지금 우리에게 그런 의미이다. 성실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성실의 의미를 복숭아의 벌레 먹은 부분을 도려내듯이 난도질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단어는 시간이 지날 수록 퇴색된다. 사회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언젠가 부터 친교성을 사회성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사전적으로도, 사회성은 그것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이다. 친교성은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었다.
종교적인 의미의 성실이 세속적인 의미의 성실로 변환되었다. 점점 좁은의미로 좁혀진다. 좁혀진 땅굴에 옆면의 흙이 빨리 무너져 내리듯이 우리는 깊이 팔 수 없다. 우리는 성실하다는 것의 본연의 의미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것을 복원하는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