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해 다시 감탄하기
외국어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삶에 대한 궁금증이 없는 사람이다. 이것은 비하의 의미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그런것 만은 아니다. 약간의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외국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미 모국어를 배운 입장에서 다른 언어를 다시 한 번 얻어내려 노력하는 것은 사실 삶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모국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언어의 가능성을 이국의 언어로써 포착 할 수 있다. 모국어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이국의 언어로써 바라 볼 수 있다.
언어화 하지 못하는 느낌을 대부분 느낄 것이다. 냄새에 대한 생각, 공원을 거닐 때 터져나오는 비릿한 흙 냄새, 인간관계의 불쾌감, 쾌감의 느낌 등. 감각질의 영역을 우리는 발설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가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발설에 실패하는지도 모른다.
외국어를 배운다고 사실 그렇게 달라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언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만으로도 심미적인 쾌감을 준다는 걸 아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외국의 문자, 언어 구조, 어순, 단어, 발음 등. 우리가 미처 몰랐던 생경한 느낌을 외국어가 선사한다. 우리는 완전히 생경한 오감으로 익숙한 것들을 말하기 시작한다.
익숙한 것들을 다른 식으로 발설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것이다. 이렇게도 바라 볼 수 있구나를 몸소 느끼게 하는 것이 외국어이다. 일부러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새로운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진실로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들은 불편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면 느낄 수록 새로운 언어에 대한 열망이 커져나가기 때문이다.
언어를 키우는 힘은 삶의 불편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이런 표현을 써본다면 어떨까? 하는 미소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된다. 틀리더라도 발설하지 않으면 늘질 않는게 외국어이다. 우리는 말을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다시 삶을 시작해야한다.
모국어의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야한다. 삶의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야한다. 사실은 그 불편함이 삶을 살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포착하여 언어화 시키지 못하는 대상들에 대해 노력하는 것이 인생을 살게한다. 언어는 대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름 붙이는 순간 그것의 가능성은 거기에서 끝나버렸다. 사과를 apfel로 부를 가능성을 포기해버렸다. 우리가 개념화 시킴으로써 그것을 자세히 보려고 하지도 않게된다. 사과는 사과이다. 사과에 대한 본연의 것을 언어화함으로써 사라지게 한다. 우리가 언어로 조작하기 쉽게 하기 위해 그것은 용이성을 대가로 구체성을 희생한다.
도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갈구하는 것이 진실로 인생을 살게한다. 끝없는 바다에 표류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무한한 우주에 좌절 할 수도 있지만, 무한한 가능성에 희망을 얻기도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유한한 우주에서는 유한한 가능성 밖에 구할 수 없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좌절의 개념이 선행된다.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 계속해서 실패해야 한다. 아기의 언어 활동은 그 귀여움에 무마되어 실수를 무력화시킨다. 그러나 성인의 언어 배움은 징그운지도 모른다. 누구도 그것을 용인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외국어의 숙달을 얻기 위해 먼저 좌절해야만 한다.
그러나 언어의 가능성은 좌절보다는 희망에 있다. 계속 나아감으로서 살게 하는 것. 그게 언어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언어를 다시 배운다는 것은 무한에 대한 자신의 투신이기도 하다. 망망대해에 자신의 몸을 던져버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언어에 좌절함으로서 무한한 희망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