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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커튼콜

하나의 기억이 곧 죽음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by abecekonyv
도루의 눈에 외부 세계가 비치지 않는 대신, 이제 그 잃은 시력과 자의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외부 풍경은 치밀하게 검은 렌즈 표면을 채운다. ...(중략)... 하지만 만약 바다, 배가 도루 내면과 관련 없는 외부 세계에 속한다면, 외려 역력히 그 선글라스 렌즈 위에 정교한 축소화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루는 외면 세계를 어두운 내부 세계와 모조리 합쳐 버린 것은 아닐까. - <천인오쇠> 미시마 유키오 유라주 역譯
탁자를 사이에 두고 눈앞에 앉은 주지는 옛날과 다름없이 수려하고 잘생긴 코와 아름답고 큰 눈을 가졌다. 옛날 사토코와 이렇게나 다르지만 한눈에 봐도 사토코임을 알 수 있다. 옛날 사토코와 이렇게나 다르지만 한눈에 봐도 사토코임을 알 수 있다. 육십 년을 건너뛰어 한창 젊을 때에서 노년의 끝에 이른 사토코는 속세의 괴로움이 사람에게 줄 법한 것을 모두 피했다. 정원의 한 다리를 건너온 사람이 나무 그늘에서 양지로 나와 빛의 정도에 따라 얼굴이 달라 보일 뿐으로, 그때의 젊은 아름다움이 나무 그늘의 얼굴이라면 지금의 나이 든 아름다움은 양지의 얼굴일 뿐이다. 혼다는 오늘 호텔을 나올 때 교토 여성들의 얼굴이 파라솔 그늘에 따라 어둡거나 밝게 보였던, 그 명암으로 아름다움의 질을 점칠 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 <천인오쇠> 미시마 유키오 유라주 역譯
따라서 풍요의 바다를 쓰면서 나는 그 마지막 페이지를 불확정한 미래에 맡겨 두었다. 이 작품의 미래는 항상 부유하고 있었고, 세 권을 다 쓴 지금도 여전히 부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작품 세계의 시간적 미래가 현실 세계의 시간적 미래와 마치 비유클리드 수학의 평행선처럼 그 끝부분이 교차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확정되지 않은 미래라고 해도, 그 미래는 이천장에 이미 배아 상태로 쌓여 있어, 그 필연성을 벗어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 <소설독본> 미시마 유키오 손정임,강방화 역譯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에서 꺠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위치한 지구의 지점과,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뒤섞일 수 있으며, 끊어질 수도 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평상시와는 아주 다른 자세로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팔만 들어 올려도 태양을 멈추게 하고 뒷걸음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는 처음 순간, 그는 시간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방금 잠든 것이라 생각한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역譯


피곤할 즈음에 잠자리에 들면 바로 잠에 들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수록 과거의 강렬했던 경험이나 생각들이 떠오르게 된다. 과거의 실수나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들 말이다. 가슴이 먹먹해져오고, 잠이 들랑말랑 하는 순간마다 우리를 일깨우면서 괴롭힌다. 참지 못할정도의 울렁임이 심해지면 약간의 촉촉해진 눈물을 품은 눈꺼풀이 들리면서 우리의 의식을 일부러 외부세계로 집중하게 한다. 그러나 불 꺼진 방안에서 피로에 쌓인 몸을 가누면서 무엇을 하기보다는 내일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는게 더 났다는 생각에 좌절하게 된다. 잠이오지 않는데 어떻게 자란말인가. 다시 눈을 감지만 뇌가 무의식의 영역을 이 시간 만큼은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는지 약간의 선잠에 드는 꿈 조차도 과거의 흐릿한 기억들로 인해 다시 눈을 뜨게 만든다.


살다보면 인생의 한 막(幕)이 끝나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사실 인생의 주체로서 내가 정하는 것이겠지만, 무언가 운명적인 힘이 여기서 1부나 2부를 매듭짓는 듯한 느낌을 느낄 때가 있다. 자유의지를 신뢰하는 인간이라면 그런 것을 못 느낄지도 모르겠으나, 설령 내가 마무리를 짓는다 할 지라도 그것은 상관없다. 내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은 인생에서 중요한 국면이기 때문이다. 갈무리하며 인생을 돌아 볼 때는 아마 한 막의 후반부가 아닐까 싶다.

내가 즐겼던 영화나 게임, 소설, 경험, 음악, 학문, 공부, 사랑 등등 모든 것이 회상이라는 매개로 과거로 이어준다. 우리의 전두엽이 기능을 중지할 때,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의식이 흐릿해질 때, 우리 뇌 어딘가에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세계에서 과거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우리를 덮어버린다. 그것이 꿈으로 나타날 수도, 아주 선명하게 의식될 수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갈팡질팡 할 때마다 우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배어나온다.


프루스트에게 마들렌이 유년의 모든 기억을 환기시키 듯이, 내게도 그런 매개체란 얼마든지 있을것이며 우리에게도 그런 것은 하나 이상은 가지고 있다. 무언가에 치여서 생활하다보면 그런 밀도있는 기억들이 인생을 살게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도 그런 밀도가 찾아오겠지 혹은 지금 역시 과거의 기억 처럼 미래의 언젠가가 지금을 소환하겠지 등. 가끔 보면 인생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현재로는 파악 할 수는 없는 것인게 아닐까. 현재에 집중하라는 것이 괴로움을 덜어줄 지언정 우리의 인생을 영화같이 꾸며내는 것은 분명 과거의 환기와 미래의 필연적인 운명이 아닐지.


병리학적으로 지나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집착은 정신에 해로울 것이다. 우리가 잠들기전 왜인지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언가 생리학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게 분명하다. 우리가 약해질 때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성벽을 부수는 적군의 포탄세례처럼, 약간의 균열이 생겨날 때 무의식은 승전고를 울리며 우리를 파괴하러 쳐들어온다.


우리는 모두가 어떻게 보면 병리적이다. 우리의 한계가 우리를 특징짓는다. 완전한 인간이란 없다. 우리의 능력의 한계가 우리를 개성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단지 보편적인 기준에 맞추어 우리가 얼마나 병리적인지 아닌지 판가름 할 뿐이다. 키가 큰게 불편한 사회에서는 키가 큰것이 열등하게 된다.


내가 삶이 다할 때 분명 과거의 기억들을 종합해 볼 텐데, 아마 그런 기억들이 나와서 인생의 커튼콜을 해줄 것이다. 연극이 다시 한번 시작될지 아니면 영원한 종결로 끝날지는 알 수없어도, 나를 지탱했던 배우들이 나와서 마지막 장을 화려하게 불태우며 사라질 것만 같다. 밀도있는 기억들이 우리 인생의 배우가 아닐까. 그런 추상적인 것말고도 그 때를 살았던 나는 분명 그 시절의 배우일것이다.


잠은 죽음의 예행연습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끔 자기전 눈물을 흘리는 것은 죽음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사실 쾌락에 가깝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반출생주의사상을 보면, 그것이 마냥 염세적인것만이 아니라 논리적이고도 합리적인 귀결이라는걸 알 수있다. 불교적인 해석으로도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다. 고통을 멈추는 유일한 절대적인 힘은 죽음이기에 죽음은 사실 쾌락에 가까운게 아닐까.


잠은 우리를 내일의 활력을 비축하게한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회귀를 암시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운명의 연쇄를 겪어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루를 갈무리하는 잠의 속성은 운명의 연쇄와 가깝다. 미시적으로 우리의 삶은 하나하나의 연쇄로 이뤄져있기 때문이다. 매듭이 존재한다는 것은 진주목걸이를 보는것과 같다. 알 하나하나가 목걸의의 매듭지음이라면 목걸이는 전체의 매듭지음이다. 여러 개의 진주들이 목걸이를 종결지은것이다. 우리는 잠을 통해서 진주 한알을 보는것이다. 그것은 삶의 연속을 보여주기도하지만 동시에 삶의 종결도 암시한다.


그러니 우리는 우주 속에서 소우주(小宇宙)를 겪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타인을 함부로 비방하는게 힘들어진다. 적어도 타인도 나와 같은 환희와 좌절을 겪어내었을테다. 그것을 비교한다는게 인간의 오만함이겠지만 적어도 그들 역시 각자의 연극을 하고 있는것이다. 비난, 비방, 비판은 항상 쉬운것이다. 무언가를 쌓아올린것을 조롱하고 비판하는것은 그것을 쌓아올리는 것보다는 쉬울 수 밖에 없다.


한 시대를 겪어낸 자들을 비판하기는 쉬운법이다. 조롱과 골계가 삶을 희화화하고 가볍게 만든다면 진지함이 삶을 지탱하게한다. 무엇이든 과하면 비난을 사게된다. 현시대에는 삶을 지탱한다는 진지함 보다는 유쾌함의 시대가 아닐까. 민초의 고민을 담은 탈춤을 보는게 아닐까. 항상 시대가 말기로 갈 수록 극심한 퇴폐와 희화화가 존재해 왔다. 삶을 무겁게 살 필요는 없으나 진지함이 결여된 것을 골계(滑稽)로만 채우려하는 것은 주의해야한다. 그 반대역시 마찬가지일테지만.


타인에 대한 비판은 쉬운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안할 수는 없다. 인생에 이해득실의 관계에 내가 서있다면 나 역시 타인에게는 악(惡)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선의 위치에 서서 말하고 행동할 수는 없다.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악의 속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선언과 같은 법이다. 우리의 사회생활은 항상 피해자만 넘쳐난다. 자신이 가해자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부도덕한 일을 한것도 기억의 일부가 될 수있다. 아마 적어도 양심이 강한사람이라면 말이다. 모든 부덕을 기억 할 수는 없을테지만, 예민하게 자신이 말해놓고도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직감하는 자는 적어도 양심적인자가 아닐까. 그러나 대부분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죄를 모른다. 기독교의 원죄라는게 억울할지는 몰라도,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자체가 신에게 도전하는 루시퍼와 같다는걸 알 수 있다. 천국을 되찾고자하는 루시퍼의 분노는 사실 무엇을 되찾고자 하는지 모르는게 아닐까. 되찾을지라도 그것이 새로운 기준이 되기에 선과 악의 속성을 모두 품고있는 것이다. 나의 기준은 타인에게 악의 속성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의 기억은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다. 악하든 선하든 그것은 시간에 의해 매듭지어진다. 매듭지어지지 않았을지라도 미래의 언젠가는 매듭지어진다. 더 나아가자면 죽음으로 결국은 매듭지어진다. 인과율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의 필연성 때문에 우리는 운명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항상 무의식은 원인을 상기시킨다. 내가 이렇게 살 수 밖에없는 태생의 원인을 항상 상기시킨다. 그것을 어떻게 품어내든 결과는 죽음 이후의 것으로는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결국 우리의 최종장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잠드는 순간의 기억들이 소중하다. 과거를 회고하는 동시에 미래를 상기시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잠 하나마다 우리는 죽음을 환기한다. 기억 하나에 우리의 죽음의 씨앗이 숨어있는 것이다. 씨앗이 피어오를 때 죽음에 감염된 꽃을 보게된다. 그것의 표현형이 다르게 나타날지라도 우리의 내면의 화초들은 모두 죽음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최종장의 커튼콜을 향해 달려간다. 앵콜은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영화들은 보면서도 끝나가지 않기를 기도한다. 인생 역시도 끝나가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살아간다. 마치 로맨스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이 살아간다. 잠 하나하나가 로맨스 코미디이다. 혹은 동화적인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우리는 적어도 그런 영화들을 여러번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적어도 여기서 헤어지지 않는다는 걸 암시하는 커튼콜. 그러나 결국은 최종막은 정해져있다는걸 암시하기도 한다.


뮤지컬과 그런 낭만적인 영화들의 마지막은 멜랑콜리하면서도 삶의 긍정성을 환기하는 듯한 OST로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로맨스 코메디의 여주인공이 자신의 짝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쿠키를 보는 것 같다. 적어도 여기서 매듭지어질지라도 영화는 계속된다는걸 보여주는 것 같이. 그러나 그 영화는 모든 배우와 감독, 디자인팀. 다양한 소품팀들의 이름이 올라가면서 흑백의 스크린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아마 아련함일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아련함이기도 하고 과거에 대한 것이기도하다. 우리의 경험은 여기서 종결된다는 아련함.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다시 시작된다는 설레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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