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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감싸진 가능성

페티시즘(fetishism) 다시 보기

by abecekonyv
소설가는 되고 싶다고 되는게 아니다. 대개 나중에 생각해보니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고등학생 때는 소설가나 예술가를 막연히 동경하지만, 그저 아름답게만 생각되던 작가나 예술가에 대한 개념만으로는 진정한 문학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중략)... 애초에 더럽혀지는 순결함은 진정한 순결함이 아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일 작가가 되고 예술가가 되려고 한다면, 나는 오히려 여러분이 억지로라도 실생활에 나가는 게 장래에 작가가 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소설독본> 미시마 유키오 손정임, 강방화 역譯
그래도 '이것이 소설이다'라는 게 있을 것이다. 진정한 소설이라면 반드시 한 군데라도 숯 바구니가 도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어느 심사위원의 가슴에나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다운 희망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서, 열한명이 하나 같이, 천재의 주옥같은 글 앞에 넙죽 엎들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 <소설독본> 미시마 유키오 손정임, 강방화 역譯
헤이주는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제까지 별별 여자들과 갖가지로 연애라는 것을 해보았지만 이 정도로 심술궃고 독종적인 상대는 난생처음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막말로 온 세상이 아는 미남자 헤이주다. 이 세상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얼씨구나 하고 넘어왔는데, 아니, 이 정도로 콧대가 높은 계집이 있다니. 그야말로 느닷없이 귀싸대기라도 한 방 맞은 듯 잠시 멍해졌다. -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다니자키 준이치로 김춘미, 이호철 역譯


필자가 JLPT라는 일본어 시험을 준비 할 때 항상 들던 의문이 있다. 그건 바로 일본인들의 직장문화라는 것인데, 청해시험을 대비할 때 오디오를 들으면서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일본인들은 경멸과 깔봄이 익숙하구나. 왜냐하면 JLPT N1 청해의 대부분이 직장생활에 대한 내용인데,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의 대화를 소재로 많이 사용한다. 대게 상사의 톤이라는게 훈계조가 많다. 우리나라도 그런 것 같지만 내게는 일본어가 조금 더 고압적으로 들렸었다. 글쎄 문화의 차이인지 아니면 내가 그런것들만 봐와서 그런 것이지. 일본 드라마도 가끔보면 넙죽업드려서 미안함에 대해서 우리나라 문화라면 과하다고 볼 정도의 사죄를 볼 수있다. 도게자가 우리나라에서 과하다고 느끼는 것 처럼. 문화의 차이겠지만, 확실한건 일상생활 속에 그런 경멸과 찌푸린 인상들이 연극을 하듯이 녹아들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경멸과 찌푸림 등은 페티시즘(fetishism)을 만들어낸다. 복종에 대한 추상적인 연결이 성과 맞닿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산업이 그렇게 발달한 것일까.', '이게 막연한 추측만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페티시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바로 보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성적인 대상물을 보는것 보다 그것에 연관된 것을 보는 것은 직접적인 대상을 은폐하는 것이다. 가릴 수록 야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대게 페티시란 그렇게 작동한다.


페티시즘이라는건 결코 담백하지는 않다. 그것은 내면의 비틀림이기 때문에 자신이 감내해야하는 고통인지도 모르겠다. 도착이란 즐기는 것이기도하지만 세상 만사가 그렇듯이 고통의 측면도 가지고 있다. 페티시즘에 대해 토로하는 순간 경멸의 시선이 다가온다. 페티시즘의 종류는 넘쳐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싶을정도로. 그러나 대게 여기서 어떻게 성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지 알 수 없는 것들도 생각해보면 추상적인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은 직접적인 관찰에서 얻어진 것이던지, 극단적인 경험을 쾌락으로 오해하게 만든 것이던지.


대상을 은폐함으로서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던질 수는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것애 대해 집착하는 것은 놓고 싶지 않아서 이다. 다시말하면, 대상을 바로 보고싶지 않고 은폐한 채로 남겨두고 싶은것이다. 실루엣이 구체적인 것보다 야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알몸을 보면 그것이 오히려 추해 보일 때도 있는 것이다.


대게 패티시라는 것은 비틀림과 닮아있다. 가장 흔한 구두페티시로 예를 들면, 하이힐은 여자의 곡선을 돋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의 시각적인 효과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구두자체에만 도착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 추상적인 연결에 의한 것이다. 이 물건은 성적인 것과 연결된다는 뇌의 회로가 작동 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내가 결론짓고 싶은 말은 대상에 대해 도달하지 못한다면 복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굳이 이런 결론을 내는게 무의미 할지도 모르지만, 무한히 다가가도 도달 할 수없는 아킬레스와 거북이를 보는 것 같다. 도달한다면 그것에 대해 굴종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고압적인 것은 너와 나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상대가 혹은 내가 도달하지 못하게 만듬으로서 굴종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도달 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즐기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즐긴다면 도달하지 않는것이고 즐기지 않는다면 도달한 것이다. 은밀한 장막이 걷어진 대상에는 더 이상의 궁금증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도달 불가능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 역시 페티시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상징이란 대게 언어를 극한으로 꾸며낸 것인데, 그것은 도달 불가능하지만 극한의 언어 사용으로 대상을 어느 정도까지 환하게 밝히는 것에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본질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상징주의라는건 극한의 글쓰기인 것이다.


상징주의 시들이 대게 퇴폐적이고 약간은 음란한 풍(風)을 띠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술, 여자, 남자, 육체, 페티시 들을 다룬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언어 역시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벗겨지는 순간 진리는 드러난다. 우리에게 알레테이아(Aletheia)는 재미없는 것이다. 대상을 즐기기 위해서는 가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마술사들의 공연을 보면 대상을 얼마나 잘 은폐하는지 알 수 있다. 관객의 시선 분산은 어쩌면 이런 페티시즘적인 도착을 잘 이용하는 것에서 나온다. 숨겨져 있는 것들은 대게 시선을 끈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시선 분산이 마술사들을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그에게 어떤 속셈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이러한 은폐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생각 조차도 진리에 도달 할 수 없는 자신의 도착증의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 그 물음은 정당하다. 그러나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 조차도 버려야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버리지 않는 것은 그것을 조금 더 즐기기 위해, 그것이 가져다주는 쾌락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내가 미시마의 인용을 앞에 써놨는데 그것을 해명하자면 이렇다. 소설가란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문장을 권위적이고 약간은 위에서 내려보는 것 같은 단언적인 선언으로도 볼 수 있고, 그냥 그 자체로 와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자는 페티시즘의 형태로 작용하는 것이 확실하다. 적어도 후자는 그 의미를 바로 낚아챈 것이기 때문이다.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본것이 전자에 해당하고, 달을 바로 본 것이 후자에 해당한다.


페티시를 없애는 것은 경험인것같다. 그것이 추하다는 경험이나 깨달음을 느끼면 그것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그것의 강한 긍정성을 부정하는 것들을 맛본다면 그것의 추함을 보게 된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 한쪽만 보았던 페티시즘의 양면을 겪어내어 알레테이아(Aletheia)를 감각하는 것이다. 즉, 존재의 은폐를 벗겨내고 진리를 바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페티시즘은 반쪽자리 경험인 셈이다. 그것으로 인한 부정적인 경험을 하게 되면 대상의 마법은 풀려지게 된다. 대상에 대해 결박되어 있던 주문이 사라지면서 그것을 응시 할 수있게 된다. 막연한 동경, 존경 이런 것은 타인에 대한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에 생기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환상이 생기는 것이다. 존재와 형이상학의 간극이 페티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실재와 형이상학이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그 틈에서 우리의 환상이 피어오른다. 그 환상을 예술로 다루든 도착으로 다루든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우리의 인식이 비대칭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완벽한 대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의 당위성은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감내해내야 한다. 따라서 페티시즘이란 반쪽짜리 경험이므로 쾌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통이기도 하다. 그것으로 겪는 고통의 원인을 규명하기 힘들어진다. 그것이 온전한 인과율에서 벗어난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분명한 원인이란 존재한다. 단지 반쪽짜리 경험이기에 우리가 인식하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능성을 품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품지는 않지만, 성적 혹은 도착적인 것에 한정에서 모든 가능성을 품게 된다. 환상이란 가능성의 영역이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분명 희망이자 설레임이다. 다만 도착에 감염된 설레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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