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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벽 앞에 서서

사슴의 철학

by abecekonyv
조행덕은 서른 자 정도에 불과한 그 문장을 어떻게든 읽고 싶었다. 읽을 수만 있다면 어떤 노력도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 몇 년간 진사시험에 전념하게 만들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대신, 이번에는 서하라는 나라가 행덕의 몸속에 들어와 자리 잡고 있었다. 문자도 읽고 싶었고, 서하라는 나라의 땅도 밟아보고 싶었다. 서하인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 생활 속으로 몸소 들어가보고 싶었다. - <둔황> 이노우에 야스시 임용택 역譯
도다이지 대불전 앞 향을 피우는 곳

송(宋)나라 시절 중국의 귀족들은 천년을 돌아보며 필시 한(漢)시대의 정취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라의 고사와 역사적 일화들을 하나하나 공부하고 읊조리면서 자신의 문화적 근본을 당시의 중국인들은 상기했을 것이다. 송나라 이후 거의 천년 후인 지금의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감지하고 있을까? 아마 그럴것이다. 문화라는 것은 거대하기에 무시하기 힘든 법이다. 숙명적인 문명 사업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이미 완성된 그 인류의 대사업을 보고 있으면 절로 숭고해지는 법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사찰일수도 있고, 사상일 수도 있다.


변방에 있는 한 죽음은 항상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실제로 행덕은 거의 매일 죽은 사람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하룻밤 앓다가 허망하게 죽어갔다. 성 안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한두 명씩 죽어가는 사람을 볼 수 있었고, 성을 한 발짝만 벗어나도 모래 위로 빠져나온 사람 뼈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행덕에게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고, 또한 그들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인간의 무력함과 생명의 무의미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종교가 흥미로웠다. 행덕이 불교 경전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숙주성의 한 사찰에서 한족 승려 하나가 경내에 모인 다수의 청중을 향해 법화경法華經 내용을 강의 하고 있을 때였다. 행덕은 군중 뒤에 서서 그 강의를 듣게 되었다. - <둔황> 이노우에 야스시 임용택 역譯


필자는 4개월 전 오사카, 교토, 나라의 순서로 일본 간사이 지역을 여행 한 적이 있다. 간사이 지역 각 곳마다 일본의 역사적 문화재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 보기만한 유적들을 답사한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나는 사실 문화재에 흥미라는게 없는줄 알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 어린시절 그런 단초는 존재했던 것 같다. 경주 석굴암을 수학여행으로 대부분 가게 된다. 나 역시 경주를 그 때 처음가봤는데, 석굴암을 처음 볼 때에도 축축하고 어둡지만 온화하게 앉아있는 석굴을 보며 느꼈던 미묘함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이 과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인류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피조물 아닌가. 그것은 내게 무언가 말을 거는 듯 했지만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이 귓전에 살포시 속삭이는 운명들의 말들에 귀기울이지 않았던것 같다. 문화재라는게 얼마나 볼거리인지는 나도 성인이 되어서야 깊이 느낀다. 안압지를 볼 때에도 문명의 거대함이 내게 말을 걸었지만, 당시 성숙하지 않았던 내가 무엇을 그리 깊이 느꼈겠는가.


나라에 간 것은 오사카에 호텔을 거점으로 두고 일본에서 3일째 되는 날의 일정이었다. 처음 간사이 공항에서 오사카역에서 내리자 일본 열차의 복잡함에 잠시 시달렸으나, 도쿄에서 경험했던 것을 상기하자 금세 적응 할 수는 있었다. 호텔은 오사카역에서 조금 많이 걸어가야 했으나 걸어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쨋든 나는 3일차에 나라를 가기로 마음먹고 오사카역으로 향했다. 나라를 가려면 덴노지에서 환승하라는 역무원의 말을 듣고 기차 노선을 확인하면서 나라로 향했다. 나라로 향하는 길은 JR만 따라가면 되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일본 지하철이라는게 양쪽으로 마주보는 형태로 되어있는 곳도 있어서 승객을 마주봐야하는 불편함도 있었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밖의 간사이 시골 풍경을 보면서 일본 섬이란 참 거대하구나 생각했다. 도쿄에서도 느낀거지만, 일본은 전망대에서 바라봐도 저 멀리까지 산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수도 서울에도 도처에 산이 있다. 섬이라는게 이렇게 클 수 있는 것인지, 이국적이면서도 미묘한 느낌을 참을 수 없었다. 하긴 제주도 역시 한라산에서 바라보아도 전경이 한 눈에 담기진 않는다.


JR나라역에서 곧 바로 탁트인 길을 직진하면 나라 사슴 공원으로 갈 수 있다. 아침 거의 일찍 출발했기에 시간이야 넉넉했다. 여행 일정이 조금 타이트했기에, 나는 여독이 점점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몸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날도 엄청 움직인 전날들의 연속이었다. 타이레놀을 몇 알 먹고 잤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 아주 늦게까지 걸어다녔기 때문에 다리에서 부터 올라오는 고통을 멎게하기 위해서는 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도 그렇게 상쾌하지는 않았다.


계속 길을 따라가다보면 사슴들이 어슬렁 거리는 걸 볼 수 있다. 나라에 온 것은 사슴공원을 가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근처에 문화재들이 붙어있어 그것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여기 사슴들은 여행객들에게 전병을 요구한다. 근처 지나가는 행인의 바지 춤을 물어 뜯으며 저기가서 전병 사와서 나에게 달라는 눈을 한다. 전병 파는 아주머니 근처에 사슴들은 떼로 몰려있어, 근처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직접 털던지 간접적으로 털던지 한다. 어쨋든 사슴에게 전병을 사다주면 털린거나 마찬가지이다. 사슴들은 전병에 중독된 것 같았다. 그러나 전병 파는 아주머니를 왜 건드리지 않는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전병이 눈앞에 있는데 건드리지 않는게 신기하지 않은가. 알고보니 그것은 아주머니들이 사슴을 어려서부터 훈육시킨 결과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주위 사슴들에게서도 이 인간 아주머니와 공존해야한다는 자신들의 생활 방침을 아기 사슴에게 주입시킨 결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할지라도, 사슴들이 눈 앞의 전병을 보고도 털지 않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마치 그것이 다가갈 수 없는 운명의 벽앞에 무너지는 것 같다. 전병을 먹고 싶지만 여행객을 털어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직접 그것을 털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운명을 거부한 사람과도 같은 고고한 사슴이 있었으니, 가끔 다른 사슴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사슴들도 있었다. 전병만을 바라보는 것이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어딘가에서 홀로 고고하게 풀만을 뜯고 있었다. 전병을 주면 받아먹기는 하나 그것을 그렇게 갈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사슴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마치 다른 사슴들의 운명을 하찮게 깔보고 나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라고 다짐한것처럼. 그 사슴은 근처 유적지들을 배회하며 마치 인간인냥 눈을 여기저기 두고 다녔다.


사슴이 넘실대는 이 곳은 길바닥에 사슴 똥과 오줌이 넘쳐난다. 따라서 똥을 안밟을 수는 없을 정도로 갈색 구슬 아이스크림 같은 사슴 똥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그것이 자아내는 냄새는 그리 심하지는 않으나, 위생적으로 그리고 미관상 좋지는 않아보였다. 적어도 여기서 사슴이 몇십년 이상은 상주했을텐데 이 정도의 깔끔함을 유지하는게 신기했다. 분명 관리하지 않았더라면 유적들은 똥통이 되었을것이다. 똥을 치우는 사람들의 노고가 여실히 느껴졌다. 도로가 비교적 깔끔함에는 그들의 땀 구슬이 섞여있었겠지. 항상 우리는 그런 안보이는 사람들의 수고를 생각하게 된다.


나라 공원에 탁 트인 풀밭이 깔린 곳이 있다. 그곳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나라 불상 박물관이 있다. 우리나라 박물관이 대게 무료인것과 달리 일본은 박물관 마다 입장료를 꽤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오사카 미술관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여튼 옛날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 이 곳을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자랑했던 날이 떠올랐다. 나도 어쩌다보니 일본 나라에 와서 이 박물관 앞에 서있다. 필시 이것도 운명일거라 생각하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불상들을 보다보면 도다이지 대불전같은걸 보지 않더라도 같은 운명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부처의 광배(光背)에는 지옥도가 그려져있다.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신통력으로 꿰뚫어보는 부처의 신비로운 힘을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작은 불상들에서도 그런걸 느낄 수 있다. 가끔은 한국에서 온 불상도 있었다. 혹은 한국의 불상제조 스타일을 모방한 불상들도 있었다. 이 불상 혹은 불상을 만든 사상은 어쩌다 중국과 한국 혹은 더 멀리 서방정토에서 부터 가장 동쪽인 일본까지 왔을지. 이 불상들의 운명을 생각하다보면 가슴속에 무언가 아릿한게 느껴진다. 운명통(痛)이라 칭하고 싶다. 이 불상들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혹은 당시 사람들의 상업적 행위라는 운명의 파도에 자신의 육신을 맡겨 이 곳까지 넘어 왔으리라.


도다이지 대불전은 거대했다. 이것을 만든 사람들의 노고에 존경심이 피어오를정도로 거대하기 그지없었다. 문자체도 거대하고 대불전도 거대했다. 여기도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한다. 나는 박물관과 대불전을 보는 세트로 된 표를 사고 입장했다. 여기도 여기저기 사슴 똥이 넘쳐났다. 그것을 피하면서 다녔지만, 완전히 피하는 것은 어느 정도 포기했다. 목조로된 건축물들의 웅대함에 정신 팔려있다보면, 필시 내 발밑에 밟혀있는 사슴 똥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여행기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운명(運命) 혹은 운(運) 자체에 대한 것이다. 나는 나라 지역을 답사했고, 그 경험을 한 문장으로 일축하자면 '거대한 운명의 기억' 이라는 것이다.


옛날 세계사 책을 보다보면 중국이 오랑캐라 칭하던 나라들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토번, 돌궐, 흉노, 말갈 등 우리나라 역사에도 그것들의 이름을 들어볼 수는 있지만, 분량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유목민, 이민족의 역사를 한국사나 세계사 시간에 충족할 수는 없었다. 알고보니 중앙아시아 역사나 언어 등은 꽤나 마이너한 학문이라는 걸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서역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피어올랐으나, 타고난 게으름으로 서적조차 몇 권읽어보지 못했다. 실크로드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나라도 배제할 수는 없다. 유목민이라는 것은 운명의 힘을 거스르는 그런 자유로움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다. 문자 기록도, 무언가 도시 문명이 뚜렷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 중국을 지배했고, 도처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유전자는 우리 핏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운명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는 영역이지 않은가.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이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이런 역사의식을 상기하게 될 때이다. 과거의 피가 나에게도 흐른다. 어쩌다보니 한국에 태어나 문명국가에 살고있지만, 내 어딘가에는 그런 노마드의 취향이 존재하는게 아닐까. 나의 운명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문학적인 도취에 시달릴 때가 있다. 그런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를 듣는 자들도 있는 법이다. 바이런은 아무 관련도 없는 그리스 전쟁에서 죽었다. 그것은 그리스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역사의식에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해야할지는 모르겠으나, 운명을 느낀다는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전형이다.


이런 것을 느낄때마다, 내가 무엇을 정해서 한다는게 얼마나 오만한 행위인지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바보같이 일상에 치이다보면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잠기게 된다. 나 역시 운명의 역사에 눈꼽만큼도 저항 할 수 없는 한량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기 멋대로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것은 분명 아니다.


전쟁을 겪지도 않을 뿐더러 무언가 대단한 국가사업을 짊어지는 세대도 아니다. 따라서 운명의 힘을 덜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도다이지를 건설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질 때 인부들의 마음가짐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군대에 끌려가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역사의 흐름은 내게 운명을 바라보게 만든다. 역사는 운명의 기록이다. 적어도 자유의지란 존재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시대라는 쓰나미에 잠식당한 사람과 집들을 보는 듯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역사적 인물들과 지배자, 문명, 예술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다. 개별적인 인간사는 모두 망각되어 소실되었다. 그나마 행운이 있는 인간들은 평전이나 기록이남아 책으로 쓰여진다. 그러나 그것 조차 인물의 모든면을 보여주진 못한다. 그러나 그게 운명이라는 파도에 휩쓸리는 플랑크톤들에게 허락된 가장 큰 행운이라는 것은 변함없다.


20살 이전 청소년기에는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격정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젊지만 무언가 종교적인 마음이 들어버린다. 내가 무언가를 바꾸긴 힘들구나, 혹은 나도 보잘것 없는 인간이구나 같은 생각이든다. 그것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느껴본사람이 아는 느낌이지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우위를 두고자하는 마음은 아니지만,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느낌이라서 별로 차별을 두는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냥 나도 나라 사슴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위에서 말한 고고한 사슴처럼 되는 것이 그나마 나에게 허락된 차별화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때, 운명이란 사슴 똥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병이라는 운명을 먹고 똥을 흘린다. 사슴은 똥을 엄청 싼다. 똥은 전병의 결과물이다. 그것이 초라하고 더럽지만, 그것은 나의 결과이기도하다. 적어도 고고하게 풀을 뜯고 전병을 같이 먹으며 똥의 크기를 키워나가는 것만이 허락된다. 그것은 공원 관리원들이 치워내겠지. 마치 역사책에 지워진 몇십억명의 운명이 지워진 것처럼 내 인생도 거대한 운명 속에 소실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때면 슬퍼지기 마련이다. 거대한 운명의 벽 앞에서 나는 슬플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 인생이 똥과 같을지라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전쟁의 비극을 겪지 않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임을 알아야한다. 내가 가진 운명을 자각하는 것은 정말 힘든일이다. 비교하고 교만해지길 좋아하는 인간에겐 운명은 상기시키기 어려운 존재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도 운명 앞에 좌절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런 운명의 힘을 알았던 것일까. 그들의 신은 좌절하는 신이다.


나라에서 오사카로 돌아올 때 다시 마주보는 좌석에 앉게 되었다. 그 당시 아무도 앉지 않았기에 편하게 앉아있었다. 역을 조금 지나니 노부부가 내 앞에 앉았다. 그들은 동양인은 분명한데, 어쩐지 아내에게 말하는 언어가 영어였다. 할아버지는 영어로 항상 아내에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서양인은 아니었다. 국제결혼인가, 아니면 홍콩사람들인가. 의아해하며 앉아있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내게 말한다.

"실례합니다. 이게 오사카역으로 가는 열차가 맞나요?제가 간사이는 처음이라서요."

나는 필시 일본인은 아닐거라고 생각했던 이 할아버지의 정확한 일본어에 잠깐 놀라면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쾌속열차라 아마 지나가는 역이 많을거에요." 그리고 초행길에 아는 척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덧붙였다.

"저도 처음이라 사실 잘 모르겠네요. 저도 외국인이라서요." 할아버지가 말했다.

"일본인이 아닌 가요? 오... 어쨋든 감사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아내와 창가 햇살을 맞으며 얘기를 하고있었다. 나도 마주보는게 뻘쭘했지만 참고 앉아서 멍때리고 있었다. 가끔 그 할아버지가 내 시선을 뺏었으나 말을 걸지는 않았고, 나도 그랬었다.


마지막에 나는 덴노지에 내릴 예정이었다. 일본에서 책을 몇 권 사기 위해서 내릴 작정이었다. 내가 내리려 하자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고, 나도 모르게 인사하고 나왔다. 인사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생각이 무색하게 행동이 바로 나와버린 것이다. 그 할아버지도 웃으면서 내게 목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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