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창작에 대하여

일을 하는 마음가짐에 대하여

by abecekonyv

창작이란 대게 임신과 같다. 이 비유는 내가 지어낸 것은 아니다. 이미 있는 비유이다. 그러나 이 만큼 적절한 비유가 없는 것 같다. 쇼펜하우어도, 카프카도 비슷한 소리를 한다. 그것은 예술적 창작의 작동 방식이라는게 대게 이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과 교접한다. 내 머리 속에는 새로운 생각들과 이미지가 잉태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숙성시키기 위해서는 어설픈 행동 보다는 잠시 기다리는게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는 경험과 마음의 조화이다. 굳이 생각이라 칭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부유하기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생각이 먼저 나아갈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글들은 대게 물에 떠다니는 기름때와 같이 세상에 흡수되지 못하고 표류하기만 한다. 경험이 앞지를 때도 분명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게 치기어리고 다듬어지지 않은 순진한 글들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가끔은 독자입장에서 저자에게 너무 많은 글들을 썼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자가복제에 지나지 않는데 굳이 그렇게 써봐야 뭐하냐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항상 이런 것에 부딪히게 된다. 얼마나 쓰고 얼마나 깎아야하는가. 내가 남에게 얼마나 영향받는 것인가. 대부분 예술 교육가들은 예술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가르쳐지지 않는 것이기도하다.


이런 답답한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기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있다.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작자들이 낮은 목표를 처음부터 추구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급진적인 마음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타협한다는 마음으로 그것을 도려내고 난도질 했을것이다.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예술은 천재들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예술은 누구에게나 허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의 본연적인 위계라는 것도 존중해야한다.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을 존경한다. 그것은 그들이 짊어진 운명에 대한 찬사이다. 얼마나 어려운 것들을 짊어지고 인생을 살아냈는지에 대한 감탄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는 위계라는 것은 그런 운명을 말한다. 천재를 나는 생물학적인 정력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그들은 운명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피하지 않고 마주보며 전진한 사람들이다. 그들에 대한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놀랍게도 보통의 예술도 없는 법이다. 보통의 예술가들의 선배격인 그들을 부정한다는건 자신의 아버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천재들의 삶이라는게 꼭 좋아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한다. 왜 그런것에 시달리는지 이해못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시달림이 천재들의 폭발력을 지도하는 방향이 되었다는건 부정할 수 없다. 대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숭상하고 그것들을 엄청난 속도로 따라간다.


창작이라는게 사실 이런식이지 않을까. 자신이 감동하지 못하는 글을 쓴다면 타인의 감동 역시 끌어 낼 수 없다. 적어도 예술이란 광인의 영역이다. 어쩌면 미치지 않는다면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감동해도 다른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의 고취가 필요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와인은 취기가 오래간다. 적어도 그런 도취에 빠져서 하루 종일 신나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는 것 같다.


글을 매일 쓴다는 것도 그래서 회의적이다. 매일 이루어지는 것은 예술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일에 없는 법이다. 일상적인 일들도 가끔은 쉬고 싶어한다. 그것은 우리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도 어떨 때는 고장나기 마련이다.


저번의 글에도 올린 말이지만 미시마의 인용문을 다시 상기해보자. 소설가는 되고 싶다고 되는것이 아니다. 이 말이 진정 옳다. 내가 이것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 예술을 하는 것이다. 창작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평생 창작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창작의 영역을 맛 본 사람들은 그것을 아쉬워하기 마련이다. 이런 감정이 대부분은 비극으로 치달을 것이다. 소수만이 압도적인 결과를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 예술을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이나 학문이나 비슷하게 본다. 논문을 읽다 보면 저자의 생각이라는게 착상이 존재했다는 걸 알 수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수 많은 삽질도 느껴진다. 학문으로 살아간다는게 대게 예술가랑 비슷하다. 사실 예술가나 사업가나 학문하는 자들의 인생은 비슷하다. 대게 세상의 규칙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그들은 자신만의 우물을 파고있다. 물이 나올지 석유가 나올지 아무것도 안나올지 모르지만 그들은 항상 파고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들은 다른 세계를 맛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현시대에 그것이 맞지 않은 창작일지라도,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괴로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창작이라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그렇게 슬픈일만은 아니라는것이다. 대부분의 일들은 허무맹랑하다.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인생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창작이 누구에게나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이에겐 비탄에 잠기게 하는 말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그것 역시 인간이 하는 공허한 일중 하나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 심각해질 정도로 고민에 빠져야 할 의무는 없다. 단지 자신이 가진 마음이 욕심이 아닌건지 따져 볼 뿐이다.


내가 무엇을 할 운명인지는 살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루어진 이후에나 돌아봄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슬퍼할 일도 없지 않을까. 내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게 아닐까 돌아보는 면도 필요하다. 세상 일이 모두 내맘대로는 되지 않지 않은가. 창작도 그렇다. 누구나 창작하는 시대는 앞으로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회의 폭은 넓어질 지라도 그것을 진정 얻어서 혜택을 누리는 자들은 앞으로도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쓴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예감한 것인지, 인정받지 못 할 지라도 한자 한자 써내려간다.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무언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면 그것은 내가 전개한 논리에 따르면 그만둬야 하는 일이다. 나는 운명을 이렇게 예감한다. 나의 운명이라면 분명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하게 될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운명의 벽 앞에 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