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는가 놓는가 그것이 문제로다
그는 마저리를 보기가 두려웠다. 잠시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저리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전처럼 재밌지가 않아. 전 같은 재미가 전혀 없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내 속이 완전히 지옥으로 변해버린 기분이야. 모르겠어, 마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는 그녀의 등을 보았다. "사랑도 아무 재미 없어?" 마저리가 말했다. "없어." 닉이 말했다. 마저리가 일어섰다. 닉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 싼채 앉아 있었다. - <어떤 일의 끝> 어니스트 헤밍웨이 정영목 역譯
고전적인 입장에서 남자의 사랑은 하드보일드 문체를 닮았다.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런걸 굳이 말해봐야 무엇하느냐' 라는 전통적인 문체이다. 섬세함 보다는 가능성을 희생하여 조려낸 문체이다. 따라서 읽기 쉽지만 날선 문체이기도 하다. 거칠게 말하는 아버지를 보고 왜 그러냐고 말해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은 가능성 대신에 날선 행위로 말하기 때문이다.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그 비대함에 눌려서 행위를 멎게 만든다. 의자에 앉아서 움직이기 힘들게 만든다. 사랑을 하는데 말이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증명하듯이 아버지의 사랑은 그런 식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표현을 배우는 대신 행위를 배운 것이다.
신문기자의 문체들이 하드보일드 한 경우가 많다. 조지 오웰, 김훈, 헤밍웨이 등 전부 신문기자 출신들이다. 김훈의 산문에서 글쓰기 교육을 선배들에게 그렇게 받은것이라는 글을 읽은적이 있다. 그들에게 하드보일드느 생존과 직결된 글쓰기 인지도 모르겠다. 가능성을 희생한 대신 중립적인 날선 언어로 언어가 행위하게 끔 기능하게 한다. 언어의 중립이란 양날의 검 같은 것이어서,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어떻게든 분류하려고 하기 때문에 날선 것이 된다. 표현을 한다는 것은 장악한다는 것이다. 하드보일드적 폭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장악한다는 것에 가까운 것은 탐미주의이다. 탐미주의야 말로 폭력의 극치이다.
수학적으로 정의역에 부분집합을 만들어 제한하는 제한 사상과 같은 것이 탐미주의이다. 그것은 공역에 대한 자신의 범위를 장악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치역이 공역으로 보이게 만들게끔하는게 탐미주의 문체이다.
우리는 극한의 상징과 유려함으로 상상을 휘어잡을 수 있다. 그것을 장악하는 것이다. 풍경을 잡아내는 힘은 하드보일드 보다는 유미주의에 있다. 철판에 옥구슬 떨어지듯이 쏟아지는 유미주의 문체는 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떻게든 대상을 잡으려는 시도이자 연쇄이다. 유려함이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하위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상을 유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혹 받는자는 정적일 뿐이다. 그것은 신에게 도전하는 사탄가도 같다. 어떻게든 낚아채야하기 때문에 비워두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낱 오감에 불과한 묘사들일지라도, 대상을 붙잡기 위해선 유혹해야한다. 그렇기에 외려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유쾌함이란 사실 유혹의 속성은 아닌지도 모른다. 대게 유머는 안정에서 나온다. 유혹자의 불안함에서 유머가 나오지는 않는 법이다. 자신이 안정되고 편안해 질 때 어떻게든 골릴거리가 생각이 난다. 상대가 무슨 소리를 지껄일지라도 일언반구로 일축해버려서 웃음을 유도하는 것들은 대게 하드보일드스럽다. 일축의 효과란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치부하는데에 있다. 가능성을 붙잡으려 애쓰는 진지함보단 삶의 유쾌함을 지향하는 쪽인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생각해봄직하다. 그에게 하드보일드란 유쾌한것이 아닐까? 세상만사 어려울지라도 술 한잔에 털어버리는게 하드보일드적 덕목이다.
그러나 탐미주의적 폭력이라는 것을 설명해보자. 대상을 붙잡으려는 진지함이 그것을 유려하게 만든다. 고전적인 여성의 글쓰기이다. 언어폭력이 심한 쪽은 여성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얼추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이들의 글쓰기는 통제의 글쓰기이다. 하드보일드적 폭력이 물리적인 느낌이라면, 이것은 BDSM적인 정신적 폭력의 느낌이다. 둘은 사실 양극단의 폭력으로 기능한다. 하드보일드가 유쾌함이라면 유미주의는 쾌락에 가깝다. 쾌락이란 생리적인 반응으로 내부적인 반응에 가깝다. 따라서 어느 정도 정신적인 영역에 속하게 된다.
둘을 어떻게든 배합하라는 간단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문체에 대한 고민을 해보면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써야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쉽게 정할 수 만있다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극단을 본다는 것은 가끔은 흔들릴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양극을 맛보고 해탈하게된 부처의 경지가 아니라면, 속세에서 방황하는 인간이란게 그런법인지도 모르겠다. 문체란 정체성이다. 적어도 작가의 정체성을 말한다.
사실 정체성을 정한다는 말이 소용없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찌되었든 말을 하고 글을 쓴다. 거기서 나온 말과 글이 자신의 부분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쓰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관계없이 어떤 시점에서 발화되거나 쓰여진 것들은 정체성의 부분이 된다. 말과 글이 튀어나와 있다는 것은 이런걸 말한다. 시점을 정하면 말은 튀어보이게 된다. 작가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전 생애를 돌아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작가론을 펼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들의 작품을 다 읽어보아야한다. 문체가 비슷할지라도, 구조가 비슷할지라도 상관없다. 작품은 시간에 관여되어있다. 즉 말과 글이 시간에 관여되어있기 때문에 작가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작품을 다 읽어봐야한다. 적어도 그의 준하는 양까지는 읽어야 할 것이다.
젊어서의 고민은 양극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그런 고민은 줄어들것이다. 자신의 문체라는 것이 확립되는 시기도 나이가 들어서이다. 방황하는 이유가 이 곳에 있다. 정하는 것에 답이 없다는 생각의 바다에 표류하여 어떤 무인도에는 이르게 될 것이다. 그곳에 정착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시 표류할 자신도, 용기도, 체력도, 지력도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고있다. 따라서 문체라는 것은 시간에 의해서 생각되어야 한다.
세련된 언어도 단점이란 존재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가능성을 비대화 시켜 진지하게 만든다. 유혹의 글쓰기는 대상에 대한 진지함의 영역이다. 쾌락을 얻고자하는 도파민의 글쓰기이다. 대상을 영원히 붙잡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는 헛된 설레임을 가능하게 한다. 어느순간 모래를 잡는것과 같이 대상이 내 손에서 흐트러져 빠져나감을 느끼면, 분노하게 될지도 모른다. 분노는 진지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군인의 언어도 단점이란 존재한다. 가능성의 직접적인 묘사 대신 모든 가능성을 품게 되지만, 역설적으로 가시가 되는 법이다. 언어라는 건 날카로워야 분류하기 쉬워진다. 모호하게 언어를 처리하다보면 오해를 산다. 그것이 사회생활이기도 하지만,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않아 시원하진 않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용기의 소실이기도 하다. 언어를 짓는 것은 용기이기 때문에, 내가 분류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망각하고 푹 찌르는 섬세함이 없기 때문이다. 섬세함은 첨예한 것이다. 대상을 어떻게든 붙잡겠다는 기질이라는게 용맹함과 닮아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문장의 디테일을 좋아하는 습관이 거의 사라졌다. 나는 다이쇼 중엽에 나온 문장사전이라는 낡은 사전을 갖고 있다. 문학청년과 문학 애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사전인데, 다양한 인물묘사와 풍경묘사가 훌륭한 비유 예문들로 많이 실려 있고 게다가 일일이 주석까지 달려 있어 '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라며 편찬자가 찬탄할 정도 이다. 문장사전의 예문 대부분이, 그중에서도 명문이라 불리는 것이 비유에 기반하고 있는 건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놀랍기 그지없다. 비유와 형용사는 문장의 왕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문장을 마치 분재 식물처럼 교묘하게 접기도 하고 휘기도 하는 기술의 위상은 대부분 땅에 떨어져버렸다. 그건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지만, 여기서도 일본 문학의 이상하고 편협적인 특질이 드러난다. 서양 현대문학에서는 일례로 프루스트 같은 소설가도 클로델 같은 시인다. 지로두 같은 극작가도, 또 스페인의 가르시아 로르카 같은 시인 겸 극작가도, 비유를 남용하면서도 문학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 역시 중세의 문학 전통이 현대문학에 생생히 살아남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문장독본> 미시마 유키오 강방화,손정임 역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