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톤보리를 거닐며
살아서도 잠, 죽어서도 잠, 살아서 하는 행동은 꿈이나 다름없음을 잘 알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게 한심스럽군. 알 수 없구나, 태어나고 죽어가는 인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또한 알 수 없구나, 잠시 머물렀다 가는 거처에서 누굴 위해 괴로워하고 무얼 보며 즐거워하는지. 조메이의 이런 깨달음의 말은 기억하지만 깨달음의 열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군. 이 또한 마음이라는 정체 모를 놈이 내 다섯 척 몸뚱이에 칩거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밉살맞기 그지없어. 살가죽 사이에 숨었는지 골수 속에 숨었는지 여기저기 찾아 보지만 단서조차 찾지 못한 채 번뇌의 불꽃만 새빨갛게 타오르고, 감로甘露, 법우法雨를 기다려보지만 도통 오질 않는군. 욕망의 바다에는 파도가 험해 언제 기슭에 가닿을 수 있을지 알 수도없어. 그만두자, 그만두자, 눈멀고, 귀먹고, 육체는 재가 되어버려라. 나는 무미, 무취의 기묘한 것이 되어, - <소세키 서한집> 마사오카 시키에게 보낸 편지 1890년 8월 9일 김재원 역譯
젊음이란 축제와 같다. 고기가 구워질 때 피어오르는 연무(煙霧)가 하늘을 뒤덮어 현실세계를 가리운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은 안개에 가리워져 그곳에서 방탕을 즐길 수 있다. 쾌락은 뿌연 연기와 같아서 세상의 걱정들을 흐릿하게 지워버린다. 마치 내일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축제의 안개 속에서 쾌락으로 밤을 지새운다. 젊음이란 이런 것이다. 늙음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육신을 소비하여 얼마나 많은 쾌락을 얻을 것인지에 집중하게 된다. 노쇠함은 먼 나라 이야기인 듯 싶다. 술이 정신을 흐릿하게 한다. 마시면 마실 수록 정도가 심해져 현실을 잊게 만든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게 젊음이다. 내일이 온다는건 늙어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밤 세상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축제의 환희가 젊음인지도 모른다.
간사이 공항역에서 오사카역으로 가면 오사카 철도가 원으로 순환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오사카역에서 내려서 시계방향 노선을 탔다. 오사카죠코엔 역에서 오사카성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사카죠코엔 역에서 바로 내리면 공원이랑 이어져 있다. 공원을 거닐고, 오사카성을 보고, 다니면서 벗꽃을 구경했다. 이제 점점 벗꽃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만발하진 않았으나 곳곳에 피어있는 벗꽃밑에서 가족끼리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사촌들끼리 모여서 비눗방울을 불면서 해사하게 웃는다.
벗꽃을 보고 있자면 예쁘기도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라는걸 알 수 있다. 벗꽃이 지면 녹잎만 무성해진다. 화려한 젊음이 지는 것을 항상 꽃에 비유한다. 벗꽃을 보면 젊음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짧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가면서 과거를 그리워하게 된다. 오사카성 해자로 떨어지는 벗꽃 잎이 물길을 따라 흘러들어간다. 마치 시간의 흐름에 떠맡기는 젊은 육신을 보는 것 같다.
오사카역에서 내려서 호텔로 이동하여 3시 체크인을 했다. 잠시 쉬면서 앞으로의 여정을 상기했다. 밤에는 도톤보리에 가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호텔 침실에 씻고 누워있지나 여행이 이미 끝난것만 같았다. 앞으로 벌어지게될 여정들이 선잠의 꿈들처럼 흐릿하게 다가왔다. 경험이 없이 구체적이지 못한 상념들이 부유하여 내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한시간정도 낮잠은 괜찮겠지. 오사카죠코엔에서 산책의 피로를 풀기위해 한 숨 자기시작했다.
JR난바역에 가기 위해 오사카역으로 향하고 지하철을 탔다. 난바역에 내리자 5시 곧 밤의 축제가 시작되려는 듯이 인파가 붐비기 시작한다. 그리고 배가 점점 고프기 시작했다. 사실 도톤보리에서 비싼 저녁도 해결하기 위해 온것이다. 고기를 먹어야겠다고 다짐했으나 계획하진 않았다. 그래서 도톤보리 상가를 거닐며 고기집을 찾고 있었다. 타츠야라는 일본어가 보이는 곳으로 걸어간다. 일본의 젊은이란 젊은이들은 전부 이곳에 모인 것 같았다. 외국인도, 젊은 사람들도 다 이곳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여자들은 남자를 한명씩 끼고 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남자친구에게 어디로 가자고 아양을 떤다. 그것을 바라보며 약간은 어지러움을 느꼈으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나아갔다. 근처에 고베규를 파는 곳이 많았기에, 가게 앞 메뉴판을 뒤적거리며 적당한 곳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호객행위를 하는 점원들이 나에게 말을 건다. 여기서 먹으라는 듯이 나에게 일본어로 재촉한다. 나는 그 점원을 믿어보기로 했다.
거의 10만원 짜리 오마카세 류의 고기를 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먹지도 않았을 테지만, 여행을 왔으니 써야하지 않는가. 고베규의 A세트를 시켰다. 대게 한 점씩 샤토브리앙, 우설 같은 고급 부위가 나왔다. 철판에 구워먹으며 김치랑 같이 먹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맥주와 니혼슈 한 개를 시켜먹었다. 알싸한 맛의 니혼슈는 소주보단 달고 뒷맛이 이국적이었다. 맥주는 항상 먹던 맛이라 시원했고, 니혼슈는 왜인지 모르게 빨리 취하게 되었다. 밖의 붐비는 인파가 만들어내는 소음들이 먹먹해지고 고기와 밥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젊은 커플이 내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도 술과 같이 즐기고 있었는데, 많은 인파 속에서 술을 마시며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취지였으리라. 술은 감각을 마비시킨다. 정신도 혼탁하게 만들어 상황에 대한 감각보단 나에게 집중하게 한다.
술이라는건 시간을 망각하게 한다. 온전히 고통을 견디기 보다는 시간을 가속화하여 견디게 만드는 힘이있다. '세상 일 술 한잔 없으면 어떻게 견디겠는가.' 라는 말들은 대게 이런 취지에서 말하는 것이다. 고난을 직시하기 보다는 피하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그 고난이라는게 어짜피 해결 될 것이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더라도 어짜피 인생은 죽음으로 치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마주보는 대신 술을 택하는 것이다. 세상 일과 교섭하여 내 젊음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선언과도 같은게 술이리라.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고 싶어하는 욕구의 육화肉化가 술이 아닐까. 이 악마와도 같은 음료수는 역사적으로 인간에게 공허함 보다는 자아自我를 선물한다. 너 자신을 믿으라는 용기를 북돋우고, 허무함을 마주보지 말라고 말한다. 세상이 혼탁해지면, 나는 빛나는 법이다. 술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자신이 비대해져 뭐라도 된 것 마냥 행동하게 된다.
취기가 오르고 배도 차니 나가고 싶어졌다. 고기 값을 결제하고 나오니 점원이 친절하게 잘가라고 배웅해주었다. 오늘을 즐기라는 말을 하는 듯이 유쾌한 점원의 인사가 내 귓전에 울리자 나도 덩달아 신나져서 일본어로 고맙다고 전했다. 취기가 오르니 뱉지 않을 말도 뱉게 된다. 평소 같으면 먹지 않을 술이지만, 이런 날은 가끔 먹고 싶기도하다. 알코올의 맛이란건 씁슬하기만 하지, 미식의 측면은 아닌 것 같다. 혀를 오히려 마비시키는 힘이 있다. 음식의 맛보다는 맥주의 시원함을 증대시킨다. 그것을 맛보기 위해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미식가의 도리는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도톤보리 상가를 취기오른 채로 거닐다보면 조금은 어지럽지만 축제라는게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된다. 별천지인 이곳은 볼 것도 먹을 것도 넘쳐나고 사람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밌다. 도톤보리 강가를 구경하고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무언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 걸어가보면 어떨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구글 맵스로 30분 정도만 걸어가면 오사카 역 근처까지는 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일본은 생각보다 넓었다. 오사카 시내에 즐비한 백화점과 상가 빌딩들이 넓직하고 굵은 것은 국토에 대한 자신감을 과시하는 듯 했다. 이런 건축을 할 수 있는 일본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도쿄 긴자나 시부야에서 느꼈던 건물의 웅대함이 다가오자 몇 년전을 되새기게 되었다. 도쿄도 분명 이런식이었지, 약간은 유럽풍의 가로등, 명품관에서 노란 형광등이 찻길을 비추고 진열된 상품이 나를 사가라는 듯 손짓하고 도시의 풍경은 낮의 살풍경함을 잊으라는 듯이 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걸어가도 걸아가도 구글 맵스의 GPS는 오사카역에 당도하지 못한다. 이상하다 여기면서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계속 걸어가도 오사카역은 나오기 때문에.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먹었다. 아침부터 움직였던 다리가 지쳐 근육통이 강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걸어가는 것은 무리인가보다 생각이들어 사철을 찾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히고바시 역 근처로 가기 위해 사철을 타고 따라갔다. 퇴근하는 일본인들을 보며 세상 사는 일은 어디나 똑같구나 생각했다. 피곤에 지친 눈을 보자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 역시 걸음걸이에 지쳐서 지하철을 타지 않았는가. 나는 놀기라도 했지 이들은 일하고 왔으리라. 약간은 슬퍼지기 시작하려 할 때 히고바시역에 도착했다.
오사카는 넓구나. 호텔로 터벅 터벅 걸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젊음이란 가연성을 띤다. 불태우면 더욱 불타오른다. 과잉 될 수 있는 것은 육체가 그것을 버텨내기 때문이다. 술을 진창 먹고도 내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술을 먹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하지 않는것이 좋겠지만, 대게 인간이란 그런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지 않는법이다. 노쇠하기 싫다는 생각이 피어오르지만 친구와 술 한잔에 그정도 고민은 털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젊은이는 혼자 있는 밤을 두려워 한다. 같이 있고 싶어한다. 노쇠하지 말고 여기서 우리의 시간을 간직하자 맹세하며 술잔을 들이킨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술이란 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에 시간이 잠시 멈추어 젊음을 영원토록 지속시킬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내일의 숙취는 알 바 아니지 않은가. 내일의 나에게 맡겨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적어도 내일의 육체가 버텨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유아기의 세상은 새롭기만하다. 젊음 역시 정도는 줄어들지 몰라도 새롭기 그지없다. 새로운 사회생활, 학교생활, 친목과 여행 등으로 새로운 것들을 찾아나간다. 새로운 것들은 시간을 지연시킨다. 시간이 느리게 가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청소년기의 시간은 정말이지 느리기 그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직도 내가 14살 밖에 안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학년이 올라가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퀘스트를 깨는 심정으로 나이를 바라보았다. 그 때가 즐겁기도 했겠지만, 삶이라는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는 나이였다. 적어도 극심한 빈곤이나 가정 불화를 겪지 않는 이상 인생의 고통을 실감하기는 힘든 나이였다.
막상 20살이 되면 무엇으로 이 시기를 채울것인지 막연한 생각만 하게 된다. 아직도 이십대이지만, 이 시기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새로운 것들로 나의 삶을 채워가지만, 어디까지 그것이 가능한지 막연하기만 하다. 청춘은 아름답다는 말도 있다. 나이듬은 아름답지 않은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끝나가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젊은이는 가진게 없다. 가진게 없기에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 가능성의 압도를 견디기 위해서 불안해져야한다. 불안함을 대게 젊은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러나 그것이 젊음의 속성임을 자각하게 된다.
25살 밖에 안되어도 무언가 끝나갔다는 느낌이 들어 편해지는 마음이 있다. 할머니들이 살림살이 늘어갈때마다 재미지다는 말이 이런것일 거다. 삶의 퀘스트를 하나씩 수행해서 얻어가는 재미를 느낀다. 그것은 젊음의 가능성을 희생해서 얻은 결과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가능성을 잃어감이다. 나의 젊음의 가능성을 지불했으니 대가를 받는 것이다. 가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인게 젊은이들인지 모르지만, 그렇기에 풍족하기도 한 법이다. 그리고 반대로 늙어서는 풍족하기에 불안하지 않게 된다. 나이드는 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어짜피 모든 인간은 나이를 먹는다. 나이들어감을 부정한다면 좋을게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이가 들 수록 끝나가는 것도 있기 때문에 불안에서 벗어나는 면도 있는 것이다.
젊음이란건 꿈과 같다. 그리고 축제란 꿈과 같다. 서커스의 기상나팔은 삶의 환희를 극대화시켜 왜곡한다. 이곳은 현실을 왜곡시켜 볼록하게 만든 환상의 공간이다. 환상이란 축제와 같은 법이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잊게 만들고 쾌락으로 도취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삶의 파편화가 재조합된 꿈이란 축제와 같다. 반대로 축제란 꿈만 같은법이다. 젊음은 이런 비대해진 축제와 같지 않나 싶다. 내 인생에서 가장 짧지만 화려하게 불태우기에 비대해져 있기 마련이다. 그곳에 무엇을 때려 넣을지는 모르겠으나, 내 인생 최고로 잘생기고 화려한 나날들이 이 시기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 시기를 너무 특별하게만 바라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인생은 짧기도 하지만 길기도하다. 추억만을 바라보며 사는게 인생은 아니지 않은가. 어짜피 인생은 살아지는 것이고 나의 목전에는 나의 인생이 항상 있는 법이다. 지금의 나는 시간에 주박(呪縛)당하여 과거도 미래도 바라 볼 수 없는 실정이다.
가진자는 가진것에 대해 대단함을 못느낀다. 인간의 가장 큰 저주가 이게 아닐까 싶다. 노력하여 얻을 지라도 얻는 순간 무감각해진다. 젊음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손에서 빠져나가는 강물처럼 더쉽게 느껴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가진다는 것에 미련을 어떻게 안 두는 방법이 없을런지.
젊음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도 중요하지만, 이게 오히려 저주인지도 모르겠다. 금을 애지중지하는 부자의 마음처럼 그것에 대한 강박이 우리를 괴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