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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한 과거에서 나와 다가오라

시간에 대하여

by abecekonyv
이렇게 무사히 닷새가 지난 후 엿새째 되는 날 아침, 모자를 쓰지 않은 남자가 느닷없이 다시 네즈 신사 언덕의 그늘에서 나타나 겐조를 놀라게 했다. 지난번과 거의 같은 장소, 시간도 거의 지난번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 겐조는 상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의식하면서 평소처럼 기계같이 또한 의무와도 같이 불안할 수밖에 없을 만큼 두 눈에 힘을 주고 그를 응시했다. 틈만 보이면 그에게 접근하려는 그 사람의 마음이 흐리멍덩한 눈동자 안에서 생생하게 읽혔다. 가능한 한 냉정하게 그 옆을 지나친 겐조의 가슴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 <한눈팔기> 나츠메 소세키 서은혜 역譯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 만남이 기쁨이라면 헤어짐은 씁쓸하기만 하다. 가끔은 헤어짐 역시 기쁠 수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그런것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적어도 상대에게 시달렸던 순간들에서 이제는 해방된다는 기쁨만이 우리에게 허락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헤어짐을 불운하다고 여기지 말아야하지 않는건지.


유현준 교수가 학창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유튜브 영상이 있다. 거기서 하나 인상 깊은 이야기를 예전에 듣게 되었다. 아마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것은 '젊은시절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면 두 가지를 모두 해보려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이던 것 같다. 그것이 두 가지가 아닐지라도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맡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임은 확실하다.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두 가지는 모순을 야기한다. 적어도 그것이 나의 인생에서 두 개의 태양이 될 수는 없다는 듯이 인생을 괴롭게 한다. 그러나 그 선택 과정이 인생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너무 일찍 두 가지를 포기하는건지도 모르겠다.


효율을 따지기 시작하면 맺고 끊음이 빨라진다. 그러나 언제 끊어내더라도 결과론적으로 그것은 끊어낸것이라서, 언제부터 그것을 끊어내고자 생각했는지는 타인의 입장에서는 모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시간이 관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우리의 인생에서 시간은 선형적이다. 시간은 뒤로 돌릴 수 없기 때문에 결과를 본 이후에서야 헤어짐이나 포기의 원인에 대해 숙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합리화라고 포장하기 이전에 우리는 결과를 맛 본 후에야 원인을 따질 수 있다.


시간은 우리에게 비선형적일수는 없을까? 적어도 자연에서는 그런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미분방정식의 대부분의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루는 미분방정식들은 적어도 차원을 옮겨서 풀거나 선형적이기 때문에 해가 존재한다. 뉴턴의 운동방정식, 슈뢰딩거의 방정식 등은 적어도 우리의 인식 내에서 선형적으로 풀어내야 한다. 미분방정식의 대부분은 시간에 의존한다. 그러나 우리 자연의 대부분의 운동 방정식은 원인과 결과거 뒤엉키는 것인지 비선형적으로 나타난다.


시간이 비선형적이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층 더 높은 차원을 요구한다. 우리의 시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선이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안에선 시간이 비선형적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기억이란 우리의 과거를 환기시키지 않은가. 우리는 환기된 기억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 올 수 있다. 그것이 현재의 변화를 꽤하지는 않는다. 과거가 우리의 현재에 영향을 미치거나 미래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세계에 축 하나를 더해야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게으름이 선분을 휘게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순을 헤아리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단선적이게만 전진하고 싶어한다. 우리의 수학적 운동방정식의 모델링이 대부분 선형적인 이유는 그것이 가장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가끔은 자연과 같이 우리는 비선형적인 사고를 겪어야 하지 않을까?


단선적인 내면은 삶을 가볍게 여기게 된다. 삶은 무거울 필요도 가벼울 필요도 없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양극단을 가진 선분으로 존재하게 되고 위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존재하기에 위계가 생겨난다. 우리가 쾌락보다는 고통을 먼저 받는게 좋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때문에 그렇다. 시간이 없다면 고통을 먼저받든 쾌락을 먼저받든 그것은 완전한 평형시소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위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선적인 시간의 위계를 따라가기만 좋아한다. 그러나 자연의 본질적인 속성이 비선형적이기에 우리는 삶에서 문제를 마주하는게 아닐까? 사려깊지 않음은 단선적인 사고과정을 시간에 내맡긴다는 소리인데, 우리의 사고과정의 메카니즘이 선형적이고 싶어서 그렇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과정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역설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선형적 사고의 원동력은 비선형적인 돌아감에 있기 때문이다. 물리 방정식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삽질을 많이 해야할까? 수학자와 과학자의 노고를 생각해본다면 그들 만큼 선형적이기 위해서 돌아가는 선택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걸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인생에서 겪는게 그런 것 같다.


무엇을 하든 선택의 영역이다. 이런 이야기를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것도 시대의 혜택이다. 과거 같다면 우리에게 선택이란 존재하지도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과정이 점점 가속하되면서 비선형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을 너무 빨리 피하게되는 것은 아닐까?


저기 멀리서 헤어졌던 사람이 다가온다. 그를 무시하던지 아는체하던지는 선택의 영역이다. 그러나 무엇을 선택할지라도 결과론적으로 우리의 선택은 과거와는 다르다. 이미 끝낸 사고이기 때문에. 다시는 과도하게 돌다리를 두드리기 싫기 때문에. 혹은 재회의 기쁨을 맛보고 싶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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