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프로파간다 음악 비평
가끔 사회주의 선전 음악의 음악성에 놀랄 때가 있다. 음악성이라는 건 나는 그 곡의 구조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그리고 음악이 얼마나 마음을 휘어잡는지 두 가지를 본다. 후자는 직관적일 테지만 전자는 이런 것이다. 교회 찬송가의 익숙한 코드 진행과 돌림형식 등을 말하는 것이다. 선전 음악은 음악성의 한 축이 되는 감정적 다가옴이 극대화된 음악이라고 본다. 나는 이 쪽의 비대함에 놀라는것이다.
북한, 러시아, 그 밖의 사회주의 선전 음악들은 위대한 영도자를 찬양하거나 자신들의 이념체계를 숭상하는 가사를 지어낸다. 가사들은 대게 대중이 이해하기 쉽고 중독성 있는 운율로 짜여지는 듯하다. 그것을 암송하기 쉽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상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다. 얼마나 이게 강력한지 몇 번 듣지도 않아도 가사들을 술술 내뱉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강력한 멜로디, 간단하고 운율성 짙은 가사를 보면 이게 왜 이렇게 암기하기 쉬운지 대번 알아차릴 수 있다.
북한 연주자들의 기교를 보면 수준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대게 곡을 표현하는 음악성보다는 극한의 기교로 다듬어진 연주를 보는 것 같다. 극한의 기교를 보면 그것에 상응하는 음악성도 느껴지긴 한다. 다만 음악성이 짙게 느껴지는 것은 느린 음악이라 생각하기에 대부분 속주를 하는 북한 음악가들의 영상을 보면 기교가 더 눈에 띄어 보이긴 한다.
음악이라는 것은 적어도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미술처럼 직관적이고 시각적이지 않은 예술이기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형상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체험할 수 있다. 시간 예술이라는 분류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적어도 시간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워한다. 적어도 음악은 그렇기에 붕 떠있는 것이다.
기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회주의 선전 음악가들의 기교가 왜 이리 뛰어난 것인지. 그들은 태초부터 형이상학의 기능을 상실한 게 아닐까? 그러니까 기교만을 기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아닌가 말이다. 음악성은 음악의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자신의 사상을 필연적으로 추동한다. 북한에서 자신의 사상을 가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허용된 것은 극한의 기교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가사와 운율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대열을 맞춰 행진하는 군인의 음악이다. 절도와 절제의 음악이다. 밀턴의 실낙원 서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시형에 관하여
이 시의 시격은, 헬라어로 쓴 호메로스의 영웅시나 라틴어로 쓴 베르길리우스의 영웅시처럼, 운율이 없는, 영어로 쓴 영웅시격(英雄詩格)이다. 운(韻)이란 시나 운문에 꼭 필요한 부속물도 아니고, 참된 장식도 아니다. 특히 장시(長詩)에서는 그러한데, 그것은 보잘것없는 내용이나 서투른 율격을 돋보이게 하려 한 야만시대의 고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관습으로 전해 내려와 훗날 몇 사람의 이름 있는 근대시인들이 사용함으로써 빛이 나긴 했지만, 그들에게도 골치 아픈 장애물이었으며, 그것에 구속을 받아 많은 것을 의도하는 바와는 다르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꼬, 대개는 쓰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만큼 졸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중략)....- <실낙원> 존 밀턴 조신권 역譯
한마디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선전음악에선 용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운율은 절도의 음악이다. 적어도 그것의 흐름에 집중하게 만들고 사상보다는 행위에 집중하게 만든다.
사회주의 음악 말고도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이런 걸 발견할 수 있다. 군가, 교가, 합창단, 오케스트라 등등. 적어도 사상이나 단체에 있어서는 큰 힘을 말해야 하기에 개인의 사상이란 어느 정도 버려야 한다. 지휘자와 단원들이 합의한 음악을 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즐거움이지만, 그것은 음악의 기능을 어느 정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들의 작가관觀은 그들의 형이상학을 말한다. 그것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유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예술가에게 형이상학이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운율이 긍정적으로 기능하려면 적어도 내용의 완결성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시의 운율을 맞추려고 신경 쓰기보다는, 이미 체화되어 자연스럽게 써진 시가 운율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더 좋게 들릴 것이다.
예술가들이 기교를 선취한 이후에 기교를 퇴화시킨다. 피카소의 소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신의 기교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후 다시 산을 내려가는 듯 보인다. 그 이유는 자신의 정신성에 대한 실험이자,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인식에 있는 것 같다.
본래 모사적인 음악은 모두 이러한 일을 하는 것으로, 예컨대 하이든Franz Joseph haydn(1732~1809)의 사계나 그의 천지창조 속의 많은 부분 또한 그러하다. 거기서는 직관적 세계의 여러 현상이 직접 모방되어 있다. 전투곡도 모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배척받아야 한다. 모든 음악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내적 깊이, 이것 때문에 음악은 우리에게 그토록 친근하면서도 영원히 먼 낙원으로 우리 곁을 지나가고, 그토록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성격은 음악이 우리의 가장 내적인 본질의 모든 동요를 재현하지만, 전혀 현실감 없이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기인한다.
...(중략)... 음악의 언어가 얼마나 내용이 풍부하고 의미심장한 것인지는 심지어 다 카포Da capo(처음부터 다시 한 번) 말고도 반복 기호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반복 기호는 언어 예술 작품이라면 견딜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반면 음악의 경우에는 아주 합목적적이고 유쾌한 것이다. 음악이 말하려는 것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그것을 두 번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홍성광 역譯
선전 음악들은 반복구가 넘쳐난다. 같은 문장 구조의 가사들을 조금씩 변형하여 가사의 통일성과 운율, 그리고 사상성까지 동시에 획득한다.
적어도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음악이라는 게 기능적인 측면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사상성을 띤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의 도덕적 구분을 지을 수는 없겠지만, 음악은 무기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적어도 개인의 사상이나 집단의 사상을 띠는 폭력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
음악의 본질은 쇼펜하우어가 주지하듯이 유쾌하기에 형이상학적 폭력성을 띠는 음악일지라도 유쾌함의 속성을 가진다. 음악이란 무릇 비제Bizet의 음악과 같아야 한다는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경쾌함이 음악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프랑스적인 우아함과 경쾌함 말이다.
사람들은 음악을 특별한 예술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감각들을, 그중에서도 특히 근육의 감각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적어도 상대적으로는 : 왜냐하면 모든 리듬은 일정 정도라는 우리의 근육에 여전히 말을 걸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인간은 그가 느끼는 모든 것을 더 이상은 곧바로 육체적으로 모방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상태 특유의 정상적인 상태이며, 어쨌든 근원적인 상태인 것이다 : 음악은 이런 상태를 서서히 특수화시켜 이르게 된 것이다. 가장 유사한 기능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고서. - <우상의 황혼> 10절 프리드리히 니체 백승영 역譯
사회주의 사상을 한껏 담은 가사들이 경쾌하고 어떻게 보면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게 이질감이 들 수는 있어도, 그것은 애초에 음악의 본질적인 속성인 것이다.
음악을 듣는 행위를 '정신의 논리적 기능의 실행'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논리적 사고과정을 통한 이해'를 요하는 것이 음악 안에 내재함을 뜻한다. 리만이 말하는 '음악적 문법'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화성이론과 분석> 리만, 포스트리만 기능이론 다시 읽기 서정은 저著
음악학자 후고 리만은 음악을 보편적인 자연과학적 논리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에 의하면 음악에는 내재된 논리성이 존재한다. 선전 음악 역시 자신의 사상을 띤 논리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주 간명하고 직설적으로 우리에게 심미적인 쾌감을 더해준다.
음악에서 가사는 얼마나 중요한가. 사실 멜로디를 앞선 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이지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적어도 우선순위가 존재한다. 시에는 극단적인 음악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가 가진 한계 때문이다. 율격이 음악성을 띤다 할지라도 그것은 음악이 아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음악이란 가사 없는 기악 음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사회주의 선전 음악은 기악음악을 혐오하는지도 모른다. 음악 안에 논리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내에서 모호한 멜로디의 연쇄가 아니라 직접적인 가사의 연쇄이어야 한다. 인간은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기 때문에 언어가 가진 논리성으로 음악을 오해하게 만든다. 그것이 오해가 아닐지라도 멜로디를 기만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해의 속성에 가깝다.
음악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의 사상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자동 피아노의 연주와 같다. 자동 피아노의 연주는 생각해 보면 설계자의 의도이다. 그것은 설계자의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음악이 경쾌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니체가 이야기한 것처럼 디오니소스적이므로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음악을 형이상학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적이고 통합적인 아폴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진 상승의 느낌과 파동의 감각 그리고 본연의 경쾌함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정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이라는 것이 사상을 뺀다면 얼마나 시체와도 비슷한 것인지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음악이 가진 목적이 남에게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악은 본질적으로 디오니소스적이지만 아폴론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공백으로 둘 수는 없는 것이다. 상승과 도취만을 가진 사회주의 음악이 극한의 디오니소스적 음악이 아닐까? 사실 사회주의 음악이 극한의 도취를 가질지라도 그것이 말하는 프로파간다는 자명하듯이 우리는 항상 음악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