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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잔에 털어버릴 고단함이란

유쾌하게 살아라

by abecekonyv

글을 쓸 때 가끔 생각하는건 무엇을 백지 위에 올릴가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에 대해 필연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속어(俗語)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현장감을 부여하기에 적격이지만, 가끔은 정말이지 순해빠진 생각이라는 생각도 든다. 현대소설들을 속어가 넘쳐나기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전위적인 소설일지라도 그런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것이다. 무엇이든 양적으로 넘쳐나면 좋지 않게 보이기 마련이다. 파리도 한 마리면 신경만 쓰이는 정도이지 떼로 지어다니는 파리는 혐오 감정을 일으킨다. 사람 역시 그런데 인파가 쏠린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를 타보면 그런걸 느낄 것이다. 존재의 덧없음은 도시 지하철과 버스안에 있다. 이들 한명 한명이 운명의 무게를 지니는 존재겠으나, 그런 생각을 싸그리 말살하는 양의 증대는 인내를 요하기 마련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것은 양적인 과잉에서 나온다. 러브버그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를 생각해보라. 기껏 하루살이 같은 곤충일지라도 떼로지어다니니 사람들이 혐오하기 시작한다. 내 생각에는 그런 이론이 말과 글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백화운동이 시작되기 전 중국은 반대의 상황을 겪었을까. 청나라 귀족들의 문화적이고 상징적인 시들에 대한 반감이 심해졌던 것일까. 이해하지도 못하는 고사나 시를 읇조리는 귀족들이 고깝게 보였을 것이다. 대게 현시대의 과잉은 과거 시대의 반향일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것들이 그리워지는지도 모르겠다. 문장을 다듬고 아름다운 시구들을 읊조리는 그들의 정취가 지금은 오히려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올릴지 모르겠다는 것은 메인 디쉬가 식상함을 말한다. 흔해 빠진 요리는 어딜가나 눈에 띄지 않는다. 손님을 대할 때 어떻게든 자신의 위신을 높여주는 것은 고급진 요리가 아닐까. 요즘은 위장이 소화시키기 쉬운 음식들만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지나친 구체성이 몰입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욕설이나 속어의 비대함이 글의 통일성을 방해하는 경우가 그렇다. 미감이 있는 사람들만이 느끼는 감각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나 전위적이라는 역설적인 폭력이 글 자체를 해치고 있을 때도 있는 법이다. 가끔은 전위 예술에 대해 생각해본다. 필자는 현대 클래식 음악을 가끔 듣는데, 사실 그렇게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개념과 추상성으로 멀리나아가면서 어떻게 보면 대중적이고도 고전적인 것들은 무시되는 경우가 있다. 좋은 경우도 물론 있으나, 생각해보면 고전적인 취향을 어느정도 반영한 전위적인 음악들이었던것 같다. 나도 완전히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지, 새로운 것들을 온전히 감내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실험이라는 것은 이론의 검증이 아니던가. 요즘은 실험이 비대해진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데 실험이라는게 가능한 것인지. 세상에 위용을 떨칠만한 대단한 이론이 아니더라도 컵케익을 먹을지 조각케익을 먹을지, 망고 슬러시를 먹을지 아메리카노를 먹을지에 대한 지론은 필요한 법이다. 대게 가끔 벗어나서 새로운 시도로 실험해보는 것은 용인되겠지만, 카페에 가서 해장국을 끓여달라고는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문체를 바라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속어를 사용한다고 경멸할 필요는 없다. 상징과 문어체적인 표현이 넘쳐난다고 작가의 진지함과 고지식함을 조롱할 필요도 없다. 그냥 받아들여보고 생각해보는 쪽으로 생각이 나아가는 것 같다. 현대는 진지함을 대게 경멸한다. 전위적인 시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인내를 요하는 사상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작품은 적어도 타인의 물화(物化)아니던가.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시간을 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운 제어공학 이론을 배울지라도 체계적인 공학 학습과 배경지식을 쌓아가다보면 이해하기 마련이다. 다만 현재는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치부되니 그런 것이다. 쉽게 쓰라는 말이 넘쳐나는 것은 타인에 대해 생각하기 싫다는 말이기도 하다. 알아먹지 못할 글을 쓰는 것도 문제지만 개인적인 측면에서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이 부족한 것이 아닌지도 생각해야 한다.


예술이 새롭다는 것은 고전적인 예술가들의 입장이지 대게 대중적인 입장은 아니다. 대중들이 오히려 새로운 예술에 익숙하다. 우리의 옷과 아파트들은 현대 미술의 응용이지 않은가. 오히려 예술가들이 장애를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평생을 고전적인 문화 학습에 치중했기 때문에. 오히려 음악이든 미술이든 현대 예술은 대중들이 더 익숙한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벽화와 조각 스타일에 익숙한 사람의 입장에서 칸딘스키의 추상화가 새로운 것이 아닐까? 오히려 전위성이 고전적인 예술들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추상성의 남용은 다시 구체성으로 회귀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속어는 예술에서 구체성 보단 전위적 추상성에 가깝다. 예전에는 그런것을 넣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문자와 언어가 일치하지 않던 시절 문자의 세계는 어느정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밋밋하고도 보고서적인 측면이 강조된다. 나 역시 그런 문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가끔은 그런 것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하지만 시대의 어쩔 수 없는 점이지 않겠는가. 사실 지금의 글이 더 좋을 수도 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쉽고 간결한 문체가 좋지 않나.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는 현상을 붙잡고자하는 진지함을 지나치게 조롱하기 때문에 그런 쪽을 옹호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요새는 그런 진지함을 쉽게 조롱한다. 사실 그런게 가장 필요한 시기인데도 불고하고 유쾌함만이 시대의 덕목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현대의 불안이 그런 과한 긍정성을 추동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 관계의 과잉은 대게 홀로 있는 것의 불안감에서 나온다. 역설적으로 유머라는 것이 불안한 상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쉽게 통찰 할 수 있을것이다. 스탠드 업 코메디언들의 영상을 보면 항상 그것이 인위적이든 정말로 자연스럽든 그들의 행동거지는 안정되어 있다. 관객들을 조롱하고 유머로 승화시키는 그들의 태도는 불안함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당황하는 모습에서 코믹한 연출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게 그들의 언어는 유쾌하면서 진지하다. 사실 진지함이 유쾌함이 아닌걸까. 세상의 말들은 불안의 말이다. 불안은 불안을 키우기 때문에 그런 비정상적인 유쾌함이 넘쳐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에 대한 진지함을 말하는가. 진지함이란 사실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냥 인생에 대한 진지함이라고 퉁쳐놓고 말해보자. 그것이 오히려 유머를 가능하게 한다. 불안을 직시하고 견대내면서 나온 유머들이야 말로 하드보일드한 것이다. 어설프게 상남자 행세하면 고깝게 보이는 것이랑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유머란 그런 존중에서 나온다. 상대의 말을 신뢰한다는 전제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불안한 유머는 유쾌하지 않다. 오히려 혐오만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조소할 수 있는자들은 그것이 쓸모없는 생각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진지한 자들이다.


삶에 대한 진지함 보다는 허무주의적인 망령이 시대를 지배할 때 건강에 치중하게 된다. 몸이라도 지켜야하지 않는가. 니체가 말한 건강에 대한 과잉 염려증의 시대이다. 현대의 삶은 허무하다. 삶의 진지한 목표역시 허무한 법이다. 따라서 쾌락을 견디는 육체의 건강함이 비대해진 것이다. 과거의 삶을 들춰보면 현대인들은 상상도 못할 주량과 비정상적인 건강상태에 시달리는 옛날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더뎠었고, 영양학적인 발전과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측면도 있으나, 몸에 대한 신경을 쓰기 보다는 삶의 목표와 진지함에 대한 숙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비위생적이고 가난한 환경에서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가장의 사명감은 진지함에서 나온다. 펍에서 술 한잔 때리며 인부들과 폭소하는 그런 하드보일드한 유머들은 삶의 고단함에서 나온다. 보드카나 위스키의 시대는 지나갔다. 유약하기 때문에 불안한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아버지들은 아이들에게 불안하다고 말하지 않지 않은가.


교육은 어떻게 보면 이런 측면에서 인간을 도려낸다.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에 맞추기 위해 퇴화를 가속화 한다. 야생성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런 실험에 저항하겠지만, 대부분은 어느 정도 규격에 맞춰진다. 항상 유전적이든 환경적이든 사회에 맞지 않는 인간들이야 자연 상태에서 계속 생겨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회에 녹아들어 살아가는 것도 어느 정도 행운에서 기인한다. 교육을 습득 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재능. 그러나 어딜 가나 외부인은 존재하고 심한 반감을 지닌 사람도 존재한다. 교육은 유년시절의 가능성을 퇴화시켜 하나의 측면을 극대화 시키는 과정이다. 자연에서 살아갈 때 사냥 기술을 배우는 것도 그런 것에 속한다. 그러나 문명화 되면 되어갈 수록 그런 교육이 편협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야생의 규칙들을 하나 하나 부숴가면서 인간을 유약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대학에 다니면 남자는 대게 이십대 후반 까지 교육 받는다. 70 후반에서 80정도가 평균 수명이라 예상해 보면 인생의 사분의 일 조금 넘는 정도를 교육받으면서 지낸다. 그리고 그것이 별로 효험이 없다는 것은 삶을 살다보면 느끼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런 면도 한번 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반-교육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육이 진지함을 퇴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삶에 대해 숙고하는 경험보다는 시험 공부를 해야하는 법이다. 문명화 된 사회에서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람? 선생들이 진로에 대해 숙고해 보라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하지만 씨알도 안먹히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태생적인 환경의 유약함이다. 빈곤하지도 결핍보다는 불안한 유쾌함의 과잉이 넘쳐나는 시대이기에 그것에 절여져 살아가게 된다. 술을 배우기 보다는 책을 배우기 시작한다. 삶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무슨 직업을 가질지에 대해 생각한다. 대게 야생성을 잃어가는 강아지와 같다. 사냥 기술을 잃어버린 사냥 개들이 가축화 되면 순종적이게 된다. 그들에게 허락된 야생성은 주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것을 적절하게 쓸 수 있는지의 여부에만 달려있다. 어딜가나 그르렁 거리는 강아지는 인간 세계에서 환대받지 못한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들이 살아남는다. 귀여움의 과잉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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