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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는 유람기

여행에 대하여

by abecekonyv

필자는 여행에 큰 의미부여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창한 해외여행이 아니더라도 도보 여행, 기차 여행, 안가본 곳 탐방 등 여행이라는 것도 세세하게 쪼갤 수 있고 내가 일상생활에 끼워서 할 수 있는 간헐적인 취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세밀한 관찰력이라는 건 대게 인생을 힘들게 한다. 그것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바라 볼 필요는 없지만, 가끔은 예민함에 지쳐서 혼자 괴로워 하는 시기도 있기 때문이다. 무디고 여린것에 도덕적 우위란 없다. 단지 쓰임이 다르고 쓰여질 곳이 다를 뿐이다. 나도 가끔은 무딘 면도 있다. 타인이 생각하는 고민거리를 완전히 공감해 내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든다. 인간은 보통 경험한 것들에 대해 말 할 수 있다. 들어줄 뿐이지 그것에 대한 정황은 모르기 때문에, 타인이 일장연설을 할지라도 감정이 섞인 언어들을 지어낼 수 가 없는 법이다. 감정적 공감이라는게 가끔은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 실감한다.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들으면 슬프긴하다. 슬픈 영화를 보면 울고 나오지만 여운은 가시기 마련이다. 내 앞에 뚜렷이 영상이 나오지도 않는 타인의 일화들을 깊이 공감하기란 어렵다. 단지 내 삶의 파편이랑 이리저리 맞추어 보어 그것을 애써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 조차 타인에겐 공감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인간 경험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는게 이런 대화이다.


필자는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를 한 번 이상은 가본 것 같다. 북도와 남도로 나누면 가보지 않은 곳이 생기겠지만, 한번 쯤은 각 지방색을 맛본 것 같다. 그것이 뚜렷하든, 흐릿하든, 내게 머리속엔 각 지역의 편견들이 자리하고 있다. 부천에서 태어나 인천과 서울에서 밖에 산적 없는 경기도 촌놈이 시골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조부모의 집이 근처에 있기에 명절날 시골에 내려가지 않는다는 특혜를 누리고 살았으나, 가끔은 시골에 대한 동경이 생긴다. 경기도에 갇혀서 25년을 살았다. 자연과는 거리가 먼 살풍경한 건물들 사이에서 평생을 살았다. 사투리도 하나 모르고 여행을 많이 다닌 것도 아니기에 지방의 색도 깊이는 모른다.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학교를 벗어나 외부 활동을 하러 학생들과 걸어가던 때가 있었다. 외교관 아버지를 두어서 어린 시절 부터 아프리카나 아시아, 유럽 등지를 여행한 아이가 있었다. 덩치와 체격이 좋고 키가 컸다. 본인도 그 시기 키가 큰 편이었으나, 그 친구는 압도적으로 컸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타버려서 이국 생할을 오래한 티를 내는 것 같았다. 그가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약간은 부러워졌다.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 언어에 대한 이야기 등 내가 앞으로도 경험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들을 어린 나이에서 부터 경험한 이 친구가 부러웠다. 여행에 대해 그렇게 막연한 동경은 지금도 없지만, 진기한 것들을 많이 본 이 친구의 눈을 잠깐 빌려보고 싶었다.


나는 지금 이 친구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막연하게 부러워 했던 기억만은 지금도 남아있다. 여행이라는 것도 이렇게 작동한다. 기억이라는게 구체적인것은 망각할지라도 구조는 기억한다. 내가 도쿄에서 기억나는 역이름은 우에노, 카스미가세키, 오다이바힌코엔, 신주쿠, 긴자 등 밖에 없다. 도쿄로 친구들과 여행을 갔을 때도 일본어와 한자는 알고있어서 수 많은 단어들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모든 이름들을 소실해버렸다. 정확도가 떨어지는 대신 공간이 남는다. 아키하바라에는 이런 것이 있었지, 긴자의 밤거리는 정갈하고도 화려했지. 신주쿠는 젊은이들로 붐비고 길바닥이 일본 같지 않게 더러웠지 등. 언어와 이름을 망각하고 공간과 행동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기에 여행은 책과 비슷하다. 책을 아무리 읽어대도 그 내용을 전부 암송하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이런 것을 이 책 어디선가에서 본 것 같다는 흐리멍텅한 기억만이 나의 신경계에 잠겨져있다. 그런 경계선의 기억들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책을 펼치면 단어가 머리 속에 남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대게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구조에 대한 감각만은 더욱 선명해진다. 수학문제를 무엇을 풀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은 나지 않더라도 강화된 개념과 응용력은 남겨진다. 대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추상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구체성이 선행된 추상적인 것들일 것이다. 개념적인 것을 먼저 보면 기억에 남지 않는다. 칸딘스키 추상화를 한 번 본 기억만으로 똑같이 그려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추상화라서 고전적인 기교를 덜 요구하는지는 몰라도, 연관없는 것들을 한 번에 머리 속에 저장하는 사람은 드물다.


책에는 무엇을 선택하냐는 문제도 끼어있다. 우리가 읽는 책이나 영화 같은 문화물들은 한정된 자본의 영향으로 제한된다. 우리가 어떤 책을 고를지는 대게 우연해 의해 결정된다. 이유는 시간의 한정됨에 있다. 시간이 무한대라면 그런 선택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이 유한하기에 우연이 작용하고 그에 따른 선택이 따라온다. 여행도 이 문제에 빠져나가기는 힘들다. 해외여행 나라를 정하던지, 국내여행 중 어느 지역을 갈 것인지는 각자의 취향에도 관련이 있지만, 대게 종합적으로 보면 우연에 호소하게 된다. 내가 어떤 취향을 가지게 된 경위 조차도 우연이지 않은가. 그것은 내가 태어날 때 부터 선택한 것이 아니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어디를 갈지 내가 선택하는 것은 유행이나 취향 그리고 아주 크게 본다면 우연에 의해 정해지게 된다.


조금이라도 이국적인 경험은 삶에 특수성을 부여한다. 아베 코보나, 산월기를 쓴 나카지마 아쓰시 같은 사람들은 만주나 조선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일제 치하 조선의 풍경과 그 당시 중국 만주 지역에 대한 경험이 그들의 글과 소설에 남아있다. 나카지마 아쓰시의 단편 '범사냥'에서는 조선인 청년을 도쿄에서 다시 보는 장면이 있다. 성인 용품 광고에 정신이 팔려 옛 친구를 뒤로하고 사라져버린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에 살아있다. 타국이나 지방의 경험은 뭔가 아련하다. 나는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나, 물리적 거리감이 만들어내는 아련함이 있다. 장거리연애의 슬픔일까. 내가 살던 고향에서 멀리 떠나갈 수록 그런 경향이 심해진다. 유년의 기억이 그리 유쾌하지 않더라도 무언가 중력이 고향으로 작용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다. 그곳이 자연과 하나 되는 시골이었으면내 유년의 감수성도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인 것이다.


오사카행 비행기에서 강원도 산 능선들을 바라보았다. 상공에서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을 보듯이 남성적인 굴곡을 자랑하는 산들이 구불구불 헤엄쳐 갔다. 마을하나 안보이는 저 곳에는 무엇이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시골 출신이 아니라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연친화적인 환경이었다면 어느정도 가늠이라도 해봤을 텐데. 저렇게 깊은 산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다. 춘천에서 몇 년을 있었지만, 춘천도 큰 도시였다. 내가 생각하는 시골은 더 나가서 홍천이나 철원으로 가야지 보이기 시작했다. 비싼 아파트 단지가 춘천에는 오히려 많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 넓은 공원이 있고, 뻥 뚫린 여름 하늘에 멀리 서는 큰 산이 어디를 바라보든 굽이치고 있다. 산의 검은 테두리는 뚜렷하다. 구름이 낄적에도 산의 위용은 내 시야를 압도했다.


동해를 언젠가는 보러 갈 것이다. 강릉이나 속초 등. 가고 싶은 곳은 다른 지방도 있다. 이런 계획을 세우고 항상 여행에 대한 염두를 해두지만, 그것이 언제 적절히 시행될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이 언제 쯤나게 될지, 주머니 사정이 언제 쯤 괜찮아 지게 될지 따져보고 해야하기 때문이다. 아마 젊음이 가기전에 전국 팔도를 돌아다녀 볼 계획이야 있다.


양보단 질이라는 이야기는 항상 시간이 관여해 있는 이야기이다. 앞서 말했듯이 시간이 유한하지 않다면 우리에게 우연과 선택이라는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 무한한 생은 완전한 인간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든 질적인 선택을 하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이다. 여행도 책도 양보다는 질일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볼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최대한의 공력을 쏟아붙는 것이 좋지 않을까. 기억에 남지 않는 여행도 분명 존재한다. 그 곳을 언제 갔었는지 하는 생각이 드는건 온전한 경험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다.


글의 서두에 세심한 관찰력에 대해 써놓았지만 그것은 살아가는데 불편함이기에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행에서는 말이 다르다. 삶이 불편한 사람들은 여행에서도 불편하기에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일주일도 안되는 여행일지라도 시간이 느리게 간다. 느끼는 것이 많고 불편한 것이 많기 때문에. 자신의 나라나 익숙한삶의 터전 조차 불편한 이들이 외국이나 지방에 가서 느끼는 것은 더욱 많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존재한다는 옛말은 옳은 것이다. 삶을 희생하여 여행을 비대화시킬 필요는 없겠지만 나름의 장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지역 구멍가게에서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불편하다는 것은 통찰이 깊다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글쎄 도시의 살풍경함을 태생으로 하는 나의 일생을 앞으로 신기한 것을 많이 보게 될것이라고 달래고 싶다. 재미없는 것들을 보고 살았으니 재밌는 것들을 보겠지. 뭐 사실 어디에서 태어나도 이런 생각은 들것 같다. 사실 관찰력이 깊은 사람들은 어딜 가서도 새로움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나의 어딘가 둔해빠진 면들을 갈고 닦다보면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 튀어나올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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