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바다에서 고래를 낚다
杏花飛簾散餘春한데 살구꽃이 발로 날아들어 남은 봄마저 흩뜨리는 듯한데,
明月入戶尋幽人이라 밝은 달이 문으로 들어와 고요히 사는 사람 찾아온다.
褰衣步月踏花影하니 옷자락 걷고 달아래 거닐며 꽃 그림자 밟노라니,
炯如流水涵靑蘋이라 환하기가 마치 흐르는 물에 푸른 개구리밥 적시는 듯 하다.
花間置酒淸香發하고 꽃 사이에 술자리 펴니 맑은 향기 피어나고,
爭挽長條落香雪이라 다투어 긴 가지 끌어당기니 향기로운 꽃잎 눈처럼 떨어진다.
山城薄酒不堪飮하니 이 산성의 묽은 술은 마실 만한 것이 못 되나,
勸君且吸杯中月이라 그대에게 권하노니 술잔 속의 달이라도 마시게나.
洞簫聲斷月明中에 퉁소 소리 끊어지고 달빛만 밝은데,
惟憂月落酒盃空이라 달도 지고 술잔 빌까 오직 그것이 걱정이네.
明朝卷地春風惡이면 내일 아침 땅을 말 듯 봄바람이 거세게 불면,
但見綠葉棲殘紅이라 다만 푸른 잎 사이에 지다 남은 붉은 꽃만 보이리.
月夜與客飮酒杏花下 蘇軾소식 <고문진보> 中 황견 이장우,우재호,장세후 역譯
물질은 가지면 좋지만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괴로워지기도 한다. 그것을 죽을 때 까지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물질에 감정과 공력을 낭비하게 만든다. 그 괴로움이 취미의 일부기도 하겠으나, 가끔은 견디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프라모델을 모으는 사람들은 프라모델의 양과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등을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그런 고민 자체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보자면 허무한 것이다. 언제까지 이것들과 함께 갈 것인지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취미의 종착점은 부동산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물건을 쌓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고급 취미로 추앙받는 오디오 역시 어느 정도 공간을 요구한다. 음질이 얼마나 좋으면 넓은 공간 속에서 연주자가 내 앞에서 연주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라고 한다. 물질은 우리의 감각을 풍요롭게하고 간지럽히지만, 괴롭게하기도 한다. 간지럽다는 표현이 맞는 말이다. 혹은 감질맛 난다는 표현도 맞는 말이 될 것이다. 그것들은 더 많은 화학 작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글레이즈드 도넛이 가끔은 숨쉴 틈도 없이 들어갈 때가 있다. 그것은 설탕 코팅과 빵의 감질맛이 도넛을 물리지 않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끔은 언어에 취하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즐길만한 무엇인가 없을까 생각해보면, 가장 좋은 취미는 언어를 짓는 것이다. 시인의 취미가 적어도 죽음 직전 까지는 유지 될 수 있지 않을까. 언어를 짓는 다는 것은 물질을 요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문방사우文房四友같은 도구들만 요구된다. 현대에는 종이와 펜만 요구된다. 사실 머리만으로도 지을 수 있기에 생각만으로도 가능하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물질을 요하지 않는 취미 중 하나가 된다.
언어가 실재를 어떻게 포착하는지를 생각해보자. 보통 두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추상적인 언어와 구체적인 언어. 그러니까 전자는 중국어나 한문에 속하고 후자는 알파벳 문자를 말한다.
알파벳은 적어도 구체적인 언어에 속한다. 문법적 기능이 중요해지고, 언어의 실용성이 증대 된 언어이다. 대게 연습으로 체화시킨 이후에는 오히려 쓰기 쉬운 언어에 속한다. 문법 체계가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등 오히려 문장 짓기에는 편한 언어에 속한다. 러시아어 화자가 댓글에 이런 말을 쓴적이 있다. 6격 변화에 대해 자신들은 너무 익숙해서 그렇게 까지 어려운 줄 몰랐다는 말. 사실 그건 한국어도 마찬가지이다. 각 나라마다 배우기 어려운 점은 존재하지만, 쓰기는 쉬운 언어에 속한다. 내가 앞으로 말할 한문이나 중국어에 대해 생각해보면 지금 하는 말이 당연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가 한문 교육을 체계적으로 듣거나 배우진 않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과거의 기억들을 살려 조금씩 배웠던 경험이 있다. 이유는 중국어에 대한 관심과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인데, 나는 그런 정취가 좋았다. 추상적인 시인의 정취. 아무것도 없을 지라도 뭔가 바라보며 말을 짓는 정취. 손에 붙잡히는 느낌 보다는 유령같이 내 손에서 흐트러지는 잡히지 않는 이상 같은 언어. 한자의 생김새의 유려함 등. 내게 한자를 독학하게 하는 원동력이야 충분했다. 따라서 일본어나 중국어를 배울 때 한자에 거부감도 없었고 그것을 즐긴편에 속한다. 쓸 수 있는 한자가 늘어감에 따라 쾌락도 얻는다. 벽자僻字나 고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때마다 쾌락도 얻는다. 요즘은 이해하기 힘든 고답적인 취미일 수도 있지만 취미라는게 그렇지 않은가. 대게 취미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소수 취향을 내세우며 우쭐대긴 싫지만 가끔은 나의 관심거리가 닫혀있다고 생각도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런 닫힌 취미야 넘쳐나기에 나만 그런 것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되기도 한다.
한문을 배우다 보면 해석가능성의 여지에 놀랄 때가 많다. 처음엔 한문을 잘못 배우고 있는지 착각이 들 정도로 번역가의 재량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인 경우가 많았다. 내가 무언가 놓치는 것인지. 그런 생각이 항상 들고 지금도 익숙해졌을 뿐이지 확언하긴 힘들다. 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어느정도 있지만 아직도 중국어 문법 체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한족의 언어는 약간 두루뭉실한 측면이 있다는게 나의 지론이다. 중앙집권된 국가라 상급자에게 돌려 말하는 스킬이 늘어난 민족이라 그런걸까 생각도 든다. 시 한수 번역하는 걸 비교해보면 역자마다 엄청 다르다. 그리고 다른 언어도 그렇지 않느냐 말하면 확신 할 순 없어도. 알파벳 계열 언어들은 비슷하게 느낀다. 한문과 중국어 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번역은 찾지 못했다.
알파벳 계열 언어들은 자료의 양이나 번역가의 능력 같은 실증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그러나 한문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지만 묘한 장점은 해석의 방대함에 있다. 한자를 요긴하게 가져다 쓰는 일본어의 경우를 살펴보면, 유튜브 어디선가 出湯를 읽는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다. 대게 음료나 맥주를 따르는 기계에 붙여진 언어이다. 그것을 데유로 읽어야 하는지 슈츠유라고 읽어야하는지 알 순 없다. 그러나 레버를 내리거나 버튼을 누르면 국물이나 술 혹은 물 등이 나오는 것은 알 수 있다. 한자의 기능은 대게 이런 것이다. 구체적인 음운론적 발음이나 쓰임이 정확하지 않아도 대강의 추상성으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직관적인 언어이다. 구체성을 상실했지만 추상적인 의미의 연쇄가 가능하다. 따라서 해석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이다. 그것은 가능성을 품은 언어이다. 산 능선의 풍경을 구체적으로 언어로 묘사하여 장악력을 높이기 보다는 선 만을 따라 그린 동양화 같은 추상성이다. 우리는 실루엣으로 저기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 알몸을 보지 않고도 우리는 성욕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 메커니즘이 개념적이라 그렇다. 구체적인 질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것에서 뽑아낸 성질의 연쇄를 인식한다.
반면 한국어나 일본어 같은 교착어나 러시아어 같은 격변화 언어들은 문법에 의존한다. 문법이 안정적이니 언어의 장악력도 높아진다. 교착어보단 격변화언어가 더 강도가 강하려나. 독일어의 경우 격변화를 암기하여 체화하면 오히려 쓰기 쉬운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시간 부사는 동사 다음에 오고, 동사의 위치를 그대로두고 문법을 재배치 할 수 있고, 1격 부터 4격 까지 명사와 형용사의 격변화를 암기하는 등. 체화 이후에는 대게 쓰기 쉽다. 영어를 생각해보라. 어린 시절 대부분을 영어에 시달려서 그런 것도 있지만. 문법에 대한 이해만 있으면 작문하기는 어렵지 않다. 격변화가 처음 배울 때 어렵긴 해도 이후에는 쓰기 쉬운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반면 한문이나 중국어의 경우는 문법조차 조금은 두루뭉실한 경향이 있는 것 같다. 了의 쓰임은 중국어에서 원어민이 아닌 이상 알기 힘든 것 같다. 원어민이 아닌 이상 세밀한 의미를 파악하기에 어려운 언어가 중국어 인것 같다. 한문 시의 대부분은 주석이 엄청 길다. 그것은 한자나 문법에 대해 쓰임이 2천년 이상 쌓여서 그렇다. 황제의 이름에 쓰이는 한자는 피휘하고, 없던 글자는 만들어내고, 어떤 학자나 시인이 새로운 용례를 개발하면 후대에 주석이 한줄 한줄 늘어난다. 알파벳 언어도 그렇겠지만, 음절을 일대일 대응 시키지 않으면 도무지 알 방도가 없는 한자는 용례가 무궁무진하다. 이런 용례의 범람은 가능성의 범람이다. 사실 중국어야 말로 가장 시적인 언어가 아닐까. 언어는 대상에 도달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깨우쳐 언어 본연의 기능을 극대화 시킨 언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중국인들도 한자를 다 모른다. 심지어 상용한자들도 쓰는 법을 대부분 까먹는다. 중국인 친구가 종이에 한자를 쓸 일이 별로 없다보니 인터넷 사전을 뒤지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았다. 한자는 시의 기능이 극대화되어 실용성을 버린 것이 아닐까. 혹은 누군가에게 직언을 피하기 위한 문자체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는 동음이의어가 넘쳐나고 성조의 구별이 필수적이다. 所, 小, 蘇, 消, 素 전부 음절로는 '소'이다. 그러나 의미는 모두 다르다는 걸 알 것이다. 우리가 음절로 구별하는 경우는 성조에 호소하고, 알파벳이 없으므로 형상에 호소한다. 대상을 묘사하는게 아니라 그리는 것이다. 사실 언어의 한계를 정확히 직시하고 있다. 대상을 그리는 것이 가장 도달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것 역시 도달은 불가능하지만, 직관적으로 거의 직전까지 도달하게 해준다. 알파벳이 쓰기 쉽다면 도달의 정도가 약하고, 한자가 쓰기 어렵다면 오히려 직관적인 면도 있다. 한자와 비슷한 이집트 상형문자를 생각해보라. 대게 황제가 의자에 앉아 있다던지 뱀이 기어간다던지 대상을 그린다. 그것을 바라보면 뭔지는 몰라도 대강 이럴것이다 라는 생각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소실되었을지라도, 우리에게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생판 모르는 암하라어 문자를 보고 우리가 알아낼 것은 없을 것이다. 알파벳은 문자의 역사를 요구한다. 그것이 어디에서 창제되고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추적이 필요하고 물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자는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상을 그리면 되지 않는가! 간단하고도 직접적인 전략이다.
일본어 한자에 달리는 후리가나는 발음이 상용에서 벗어나는 이상한 경우가 많다. 반례가 넘쳐난다는 이야기이다. 일본 지명이나 일본인 이름 등은 원어민도 헷갈릴 수준 이라고 한다. 너무나 많은 용례와 예외가 넘쳐난다. 반면 러시아어 같은 언어 역시 반례야 존재하지만, 한자문화권 언어보다는 덜 한것 같다. 격변화 같은 문법의 장악력은 이를 말한다. 예외에서 벗어난 것들도 해외물이 먹은 언어던지 음운로적으로 복수형을 쓰자니 헷갈릴 만한 실라블이라 구별을 둔 발음 정도에 그친다. 일본어나 중국어의 한자와 같이 용례 주석본을 만들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내가 깊이 연구하지 못해서 이런 단언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나의 언어 공부 인생에서 이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한문은 의미론적 창출이 용이한 언어다. 서양화의 정물화 보다는 동양화에 적격이다. 난蘭의 구체적인 잎의 결이나 뿌리의 섬세함, 빛의 번짐등을 묘사하는 대신 선하나로 퉁친다. 그것을 상상하는 것은 감상자에게 맡겨둔다는 의미이다. 알래스카의 풍경을 정확하게 베끼기 보다는 몇 가지 물감을 선택해서 펴바르거나 두루뭉실하게 처리하는 밥 아저씨의 기법과 닮아 있다. 물론 그것은 완성품이 소름돋을 정도로 세밀하지만. 속리산의 소금강(小金剛)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을 보면 동양화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선조들이 먹의 농도와 선과 붓의 질감만으로도 자연물을 표현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생각의 현신이 그곳에 있었다. 동양의 산들은 키가 작다. 세월이 깎아내어 그렇겠지. 대게 에베레스트나 스위스 산자락의 풍경화가 정밀한 이유는 그것의 장대함에 있다. 대상이 너무나 자극적이기 때문에 언어도 그것을 닮는 것 같다. 산이 그것에 비해 극적이지 않은 동양은 언어의 한계를 빨리 알게 된것이 아닐까.
언어를 짓는 취미는 물질을 요하지 않는다. 물질이 좋기야 하지만 가끔은 육체만으로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을지 갈구하게 된다. 물질은 피로하기 때문에. 적어도 기력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육체의 취미를 가지고 싶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거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그러나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 '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공자孔子의 생활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장난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고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