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하지 않을 용기
글에는 삶이 어디까지 투영되어야 하는 걸까. 예술가와 작품은 분리해서 봐야한다는 말에는 동의하는 편이지만, 항상 정도의 문제는 존재한다. 동성애 성향이 짙은 사람이 대게 그런 소설을 많이 쓰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성애 취향의 사람들이 그것을 예술에 녹여내는 것도 보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지만, 느슨하게 바라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을 바라볼 때 단편적인 결과로 평가하지 말라는 말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그것이 실천이 되는지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타인을 생각하는건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되는 차원의 일은 아닌 듯 싶다. 내가 옳다고 콧대를 세우는건 대게 자신의 관점으로만 타인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 자신의 관점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겠지만, 그것을 어느정도 탈피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자폐적인 대화는 세상의 논리를 자신의 형이상학으로 종속시키는 것에 있다. 자신이 바라보는 틀에만 끼워맞추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대부분의 타인의 공감이라는게 이런 식이다. 그것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의 공감이다. 좁은 의미의 공감인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일정 부분 물러설 줄 아는 것이 열린 공감 일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패착이란건 세상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경험내에서 추려낸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대부분 나이가 들면서 망각하게 된다. 자신의 도화지에 그림이 채워질 수록 채워햐 할 부분이 줄어든다. 그러나 도화지가 세계의 끝이 아님을 도화지 세계에 사는 존재들은 망각하기 시작한다. 마치 과거 아메리카 대륙을 착각했던 콜럼버스 무리와 같은 구조이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길을 항해하여 자신이 아는 '인도'에 도달했다. 그것은 착각이었지만 그들은 세계를 이해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좋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진실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지라도 그런 사고방식을 비난할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관점에서 나의 생각도 단점이란게 존재하는데. 도덕과 기준이 무의미해져서 헷갈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나도 도달하지 못한 이상적인 이야기에 속한다. 그것은 부처를 제외하고 누구도 도달하지 못할 진리 일 수도 있다.
대승불교의 이론들은 초기불교보다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이유가 존재하는데, 어떻게든 대중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이론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중생들을 깨우칠 수 있을까하는 몇 천년의 거친 고승들의 지혜이자 노력이다. 불교의 이론적인 부분에만 천착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설명에 있어서 복잡해진다. 단순히 과학적 사실들은 간명하다는 걸 떠올려보자. H2O가 물 분자라는건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이 발견되는 과정과 화학식의 이해가 결여된 결과이다. 그것을 하는 것이 곧 학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는 이해를 필요하지 않는다. 면접관이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판가름 할 때 4년제 대학 출신인지 보는 것과 같다. 결과 한 줄에는 과정이란게 없다. 정성적인 추론을 위해서 학점이나 대외활동들도 보겠지만 그것도 확률을 높이는 작업일 뿐이지 본질적인 역량에 대해 도달하지는 못한다. 최선의 질적 추론을 위해서 도구들을 추가할 뿐이지만 본질적인 것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가끔은 그냥 보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불교의 진리는 간명하다. 설명하고자 하니 복잡해지는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구나 느낄 때가 불교를 볼 때이다. 인간의 수준과 설명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논리적 층위를 메꿔내야 한다. 그것을 이론화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승들의 머리가 갈려나간 걸까. 타인을 이해하는게 이토록 힘들다니.
불교를 동양에서 수행하는 서양인을 인터뷰한 사람이 쓴 글이 있었다. 불교에서 깨달은게 무엇이냐 물으니. "제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라고 한다. 이 말의 함의는 진정 열려있는 생각이 아닐까. 자신이 이해하지 못 할지라도 그것의 공백은 남겨야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세상과 타협한다는 이야기는 자신과 타협하는게 아닐까.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는 이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말하는건 지극히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 세계와 접속하지 않고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과 타협하는 것이다. 자신이 겪어낸 경험과 감정들은 자신의 찌꺼기들이다. 우리는 세상을 그런 찌꺼기 속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이 불공평하고 우울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타협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외부에서 우리에게 가해진 것은 없다는걸 깨달을 수 있다. 외부에서 우리에게 가해진 것이 없는데 무엇과 타협한다는 이야기인가. 본질적으로 세계는 공空 하다는게 불교의 철학이지 않은가. 비어있는 것이 우리를 뭐 어쩐단 말인가.
언젠가 나도 순수한 때가 있었지. 이 말은 지금은 순수하지 않다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하나의 극점이지 진리는 아니다. 긍정성도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바라보는 것이다. 장서를 담은 책장에는 시간이 흐르면 먼지가 쌓이기 마련이다. 우리가 먼지 쌓이는 걸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진리는 아닐 것이다. 그냥 먼지 쌓이는 걸 보는게 진리일 것이다.
젊은 사람의 패착은 세상을 모르는 체 하는 것에 있다. 나는 안다는게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게 외부 실적에 맞춰 이야기 때문에 그것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답답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답은 내 안에 있다. 그것을 밀고나가다보면 세상의 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젊은 시절 불안한게 당연한건진 모르겠지만 미덕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도덕적인 판결이 내려진 일은 아닐 것이다. 단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지 않을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력이 들어간다. 사실 깊은 이해와는 관련이 없는지도 모른다. 고기를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는 것은 설명할 이유가 없다. 오로지 고기의 깊은 맛과 자신의 취향만이 늘어갈 뿐이다. 아무리 그 고기가 좋다 한들 고기를 모르는 이에게 설명 할 방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을 펴지만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기가 왜 좋은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까. 사실 고기가 좋다는건 먹어본 자만 아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젊어서 무언가를 확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일이다. 용기의 영역이다. 의지할 곳은 내가 가진 재능과 삶을 이끌어가는데 자신에 대한 믿음 뿐이다. 순수함이란건 이런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봉사를 진정 다니는 사람들은 순수한 마음에서 하는 것일 거다. 남에게 그것이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자신이 그것을 하는 것이 적어도 괜찮아하는 믿음과 용기에서 나온다. 남에게 설명할 이유가 없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