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에 대하여
윈톈밍이 '국왕의 새 화가'라는 동화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된 민요를 읇조리듯 그의 목소리는 느리고 나지막했다. 청신도 처음에는 한 글자도 빠짐없이 기억하려고 했지만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가 들려주는 동화 속에서 천천히 시간이 흘렀다. 그는 내용이 서로 이어지는 동화 세 편을 들려주었다. '국왕의 새 화가', '도철해', '심수 왕자'였다. 세 번쨰 동화가 끝나자 지자의 화면에 카운트다운숫자가 나타났다. 1분이 남아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청신은 그제야 동화 같은 꿈에서 깨어났다. 뭔가가 가슴으로 맹렬하게 날아와 부딪혔다. 가슴이 먹먹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우주도 넓지만 인생은 더 넓어.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날거야." 자기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이 말이 지자가 했던 말이라는 걸, 말하고 난 뒤에야 알았다. "그럼 어디서 만날지 약속하자. 지구 말고 다른 곳으로, 은하계의 어떤 곳." 청신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네가 내게 준 그 별로 하자. 그건 우리 둘의 별이니까."
"좋아, 우리 둘의 별!"
그들이 몇 광년을 초월한 애틋함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을 때 카운트 다운 숫자가 0으로 바뀐 뒤 화면이 점점 희미해지다고 화이트노이즈로 바뀌더니 다시 처음의 거울로 돌아왔다. - <삼체 3권 사신의 영생> 류츠신 허유영 옮김
나는 어려서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책 보다는 게임과 장난감 그림과 만들기를 좋아했다. 대부분 지금은 거의 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재밌는건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무언가 나도 많이 바뀐것이다. 앞으로도 그림 같은 취미는 다시 배우거나 해 볼 의향이 있다. 게임도 재밌는건 가끔 사서 해보기도 한다. 내 유년의 취향을 밝히는 것은 어린 시절 책을 안읽었다는 경험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읽기는 읽었으나,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 행복한 왕자, 비밀의 화원, 노인과 바다 등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른 책들도 몇 권 읽었던 기억이나지만, 민물고기 도감이라던지 나비 도감 같은 책들만이 기억난다. 나머지 것들은 초등학생 시절 독후감 쓰기의 괴로움에 시달려 잊어버리게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는 내용의 충격으로 아직 까지 기억한다. 물론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생 저학년 아이들이 읽기 쉽게 수정된 열화판인지도 모르겠으나, 자신의 몸의 보석들을 때어네 제비에게 시켜 불쌍한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동화이다. 결국 동상銅像인 왕자는 빛을 잃어 죽게 되지만 사람들은 행복을 얻었다. 나는 내용의 따듯함 보다는 자신을 잃어가면서도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기괴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한가를 떠올리는 것은 어린이도 할 수 있다. 그것이 보편적인 관점에서 벗어난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뇌 한 편에는 내가 읽었던 동화 출판사의 그림과 표지가 기억이 생생하다.
동화는 대부분 기괴하다. 선녀와 나무꾼이 비도덕적이라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동화의 성격이 왜이렇게 뒤틀려있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떡 하나 주면 안잡아 먹는다는 호랑이의 말은 세상살이의 무서움을 말하는 것 같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미리 예방주사를 놓아주는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그리고 청소년이 그리고 청년이 겪어야하는 것은 유약함이 아니라 경험에 의한 단련이기에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주는게 아닐까. 전설의 고향의 귀신 이야기들 보다 세상살이가 힘들다는 것은 살다보면 어른들이 많이 이야기한다. 귀신은 없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존재가 까마득히 잊어버려질 정도로 세상 살이의 고달픔은 압도적이다. 어린 시절 세상은 신기하기 그지 없지만 그 만큼 미지의 무서움도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그게 그렇게 무서운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은 세상에 더욱 많다는 것.
문학의 원류를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 오히려 나는 동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두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신화와 동화. 사실 신화 역시 동화에 포섭되는게 아닐지 생각해 본다. 동화는 대게 짧다. 이야기가 가지는 시간적 길이가 짧기 마련이다. 할머니는 손주에게 새벽을 지세워서 옛날 이야기를 할 체력이 없다. 어린아이는 이야기를 길게 들을 체력과 인내심 그리고 지적 능력이 발달하지 않았다.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만들기 쉽게하기 위해서 짧아져야 한다.
동화는 대게 기담이 많기에 무서운 이야기가 조금은 혹은 많이 섞여있다. 목잘린 귀신 이야기라던가 구미호전, 사람으로 둔갑한 괴물 같은 이야기가 넘쳐난다. 아이들의 꿈자리를 사납게 만들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공포는 대게 강렬한 자극을 주기 때문에 아이들의 뇌리에 쉽게 박힌다. 동화가 짧은 이유도 이런 짧음에 있다.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지어내야 한다. 아이들이 장성해서도 기억할 정도의 강렬함을 직조해야 한다. 공포와 현실의 뜨개질인 것이다.
짧다는 것은 가능성의 함축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더라도 상상을 자극하게 만든다. 오히려 고답적인 문체는 상황을 통제하여 이해하긴 어려워도 구체적이다. 그리나 동화의 문체라는 건 구술 이야기라서 상상의 여백을 많이 남긴다. 공포란 가능성이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저기 내게로 달려오는 검은 그림자가 사자인지 코뿔소인지 아니면 코끼리인지 알 바 아니다. 그냥 도망치면 된다. 공포는 모든 가능성의 총체이다. 적어도 실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 전까지는 '모든'것이다. 사자의 머리를 가진 코끼리 만큼 거대한 코뿔소가 내게로 달려온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까지 의식하지 않더라도 공포의 메커니즘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동화는 아이들의 상상을 풍부하게 자극한다. 여기서 문학의 원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을 읽는 것은 쾌락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필연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게 한다. 이 소설을 펼쳐보기 전까지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 역사서나 철학서의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책의 전반에 대한 유추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소설에선 그런게 허용되진 않는다. 소설은 다 읽어야만한다. 그래야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중간에 끊기지 않는다. 설령 중간에 끊긴 이야기라도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후에 무엇이 나타날지 가능성을 항상 남겨두는 무한의 이야기이다. 흥부가 놀부에게 돈을 빌린 시점에서 끝난다면 흥부는 그냥 안타까운 사람으로 종결지게 된다. 이야기의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소설은 가능성의 현신이다.
플라나리아와 같은게 동화가 아닐까. 플라나리아를 잘라도 둘로 재생된다. 동화는 엄마가 피곤해서 '다음에 읽어줄게'라며 중간에 끊어도 아이들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든다. 뒷 내용이 무엇일지 말이다. 그것은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이지만, 내가 곧 알아갈 이야기이기도 하다. 설령 여기서 평생 멈출지라도 괜찮다. 어짜피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나에게 있어서 거기서 끝났기 때문이다.
그때 불어닥친 폭풍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노르웨이 전체에서 연륜이 가장 오래된 어부조차도 그런 폭풍 비슷한 것조차 겪어 본 저기 없었을 겁니다. 돛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황급히 내렸지만 폭풍이 한번 휙 불자 배의 돛대 두 개 모두 마치 톱으로 자른 듯 동강이나 배 밖 물속으로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두 돛대들 중 큰 돛대와 함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돛대 기두에 몸을 동여매고 있던 내 동생도 함께 물속으로 내동댕이쳐졌고요. - <소용돌이 속으로의 추락> 에드거 엘런 포 전승희 옮김
말해서 뭐하겠나 내가 아주 큰 청새치를 잡았다니까!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청새치와의 인생을 건 사투를 주인공에게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헤밍웨이도 쿠바 어느 해변자락에서 어부에게 들은 이야기에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들은 항상 남의 이야기들이다. 내가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런 드라마틱한 경험이 내게도 있었으면 바라지만 사실 그런 경험은 대게 나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에 허락된 운명의 장난이지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생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군대 무용담은 들으면 들을 수록 거짓말 같다. 그러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이다. 멧돼지를 포획한 이야기, 고라니와 싸운 이야기, 귀신 이야기 등. 모두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문학의 원류는 이런 순수한 무용담에 있는게 아닐까 모르겠다. 구전으로 이어지는 동화같은 무용담. 혹은 동화 말이다. 그것을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다. 내게 허락된 운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그런 것들이 생겨날 것이다. 타인이 볼 때 압도적이고 경이로운 경험들을 무용담처럼 이야기 할 날이 올것이다. 담담하게 그러나 지루하지 않게 말이다. 누구나 그런 이야기는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소중한 것이다. 타인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보편적으로 겪는 이야기 보다는 특수적인 개인의 무용담이 많다. 그것이 과장될지라도 혹은 비틀어진 채로 있을지라도 무섭기도하고 유쾌해보이기도 하다. 술 한잔 하면서 옛날 연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같다. 너무 이야기해서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 들으면 흥미로운 법이다.
귀신을 우리는 모른다. 그렇기에 동화는 성년이 되어 갈 수록 보편적인 이야기로 변모해간다. 사실 그것은 특수한 채로 남아있다. 단지 우리의 인생에서 그것이 익숙한 것일 뿐이다. 항상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이야기로 남기 때문이다. 귀신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언제나 피터팬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가능성을 희생해서 현물을 받아내었기 때문이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사람과 비슷한 심정으로 지나친 가뭄으로 쓰러져갈 때 썩은 내 팔 하나를 잘라서 공양하는 사람과 같다. 성인이라는건 가능성을 포기해서 극단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동화는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인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너의 미래라고 직접적으로 알려줄 수는 없어도 앞으로 그렇게 변할거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다. 그것을 꼭 슬퍼해야할지는 아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어짜피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까지 어른들이 케어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제나 닫힌 인간의 생각안에서 스스로가 이겨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지력과 경험에 의지해서 세상을 살아가야한다. 어른은 넌지시 눈치만 줄 뿐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꺼야?의 순수한 총체가 동화이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고래 입속으로 라도 들어가야하는 법이다. 피노키오는 고래에게 삼켜졌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지는 아니다. 그러나 대게 인생이라는게 그런식으로 다가온다. 대부분의 안좋은 일들은 내가 의도하지 않는다. 불운에 삼켜진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불운이라는게 항상 도처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아기는 운(運)의 순수한 형태이다. 아직 떼 뭍지 않은 순수함이기도 하지만, 이미 태어난 운을 순수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불운을 겪게 된다. 원래 인생 대부분의 날들이 불행하다는 할머니들의 말을 들어보자. 실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기는 누구에게나 이쁨받기 때문에 불운과는 거리가 멀다. 요람에 누워있는 아기의 시선에서 옹기종기 모여 해사하게 웃고있는 어른들의 모습이 앞으로 불운을 겪을거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인생에 그런 경험은 다시 없을거라는 환영식을 해주는 것 같다.
성인식이나 대학생 환영회에서 술을 원샷을 때리는 경우가 있다. 대게 신입에게 원래있던 선배들은 까다롭기 마련이다. 신입에게 앞으로의 일들이 순탄하지 않을거라는걸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혹시 지옥의 신고식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모르겠다. 그곳은 필시 엄청난 따듯함으로 맞아줄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세상은 지옥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세속적인 의미에서 인생은 지옥까진 아니더라도 고통이다. 동화는 아기나 소년소녀에게 겉으로 보기에 행복하기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한 지옥의 신고식이 아닐까. 행복함 이후에는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넘쳐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기를 귀여워하는 어른들의 표정이 미래의 고단함을 말하는 것 같다. 동화는 대게 이런식이다. 아기에게 인생에 대한 신고식을 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네 인생도 순탄하진 않을거라는 어른들의 조소가 담긴 것 같기도 하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이뤄 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 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업을 지으면 사실 대가를 받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대로 업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불만이 생긴다. 동화는 권선징악의 이야기이다. 공주를 납치한 악당을 물리치고 결혼한 옆나라 왕자의 이야기는 권선징악 스토리이다. 규방 아가씨가 아버지에 의해 돈으로 팔려가서 모험을 떠나는 사랑에 빠진 유생의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이다. 세상의 일들은 다양한 형태로 되값아 진다. 내가 무언가를 이루는 순간 원인이 이래서 되었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일이 되어진 것은 원인 일 수도 있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먼일의 결과일 수도 있다.
동화는 그런 인과율을 말한다. 동화는 대게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것이 항상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우연이아니다. 언젠가는 끝맺어진다는 완고한 이야기를 말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보여도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네가 착한일을 하면 분명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런 것은 없다고 깨닫는다. 사실 우리가 오해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로 내게 다가오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되값아진 일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주식같이 대박을 쳐서 내게 다가오기도 한다. 아주 작은 사소한 선행이 미래에 극단적인 결과를 몰고오는 법도 있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말하든 동화는 행복하다. 성인의 인생은 불행하기만 한데 말이다. 마치 인생이라는 것에 불운을 싹 다 지워버린 것만 같다. 사회주의 선전 영상에서 국민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그 배후에는 얼마나 많은 희생이 들어있는지 알 방도는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예감하는지도 모른다. 아, 인생이란 쉽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