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완벽주의에 대하여
미지의 세계를 여행한다는 느낌이 절실하게 내 가슴속에 와 닿았다. 하늘은 흐려 있었다. 막힘없이 뻥 뚫린 광야 여기저기에 인가의 지붕이 보였다. 이름도 모르는 관목림이 있다. 늪지가 있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바라보니 200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도랑 옆의 논둑길을 붉은 털의 개를 데리고 남자가 가고 있었다. 개가 갑자기 달려갔다. 남자는 무릎을 굽혔다. 그 앞에 하얀 연기가 솟아올랐다. 사냥꾼이다. 갈대숲으로부터 도요새라 생각되는 새 두마리가 횡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맞은편에는 관목림 앞에 멍하니 서서 기차를 바라보고 있는 농부가 있었다. 이렇게 홋카이도의 깊은곳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누구는 자연과, 누구는 사람끼리, 본토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는 홋카이도 생활, 그 깊숙한 곳으로 점점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그때는 이런 느낌이 절실하게 들었다. 그때는 아직 나의 마음도 단순했다. 이미 그 격렬한 싸움 속으로 들어가, 바닥을 헤매다 빠져나와, 결국은 패하고 돌아온 지금의 나의 심정과 비교해 보면, 정말로 그때의 나는 단순했다. - <삿포로> 이시카와 다쿠보쿠 윤재석 옮김
천재는 순수하다. 천재는 맑다. 그들의 작품에서 소재가 투명한 것인지 그들의 재능이 맑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는 않는다. 백석이 좋아했다는 이시카와의 작품들은 맑다는 생각이든다. 그래서 백석의 시도 맑은 것일까. 대게 토착 방언이 들어간 우리나라 시들은 투명하다기 보다는 색이 뚜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주성(城)같은 작품들을보면 북한 지도 위에 스포이드로 물방울을 내린 것 같이 맑다. 이시카와의 작품들은 감정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맑다. 마치 눈오는 겨울 구름아래 비쳐지는 설산의 풍경과 같다. 모든 것을 눈 아래로 잠자게 만들고 오로지 자신만이 튀어보이는 맑음. 뽀득 뽀득 걸을 때마다 겨울 눈의 순수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인다. 자동차 스키드가 만들어내는 검은 눈이 아니라 맨발로 눈 위를 걷는 것 같다. 오로지 겨울의 한기를 자신의 맨 발로 견디겠다는 용기일까. 아니면 자연을 받아들이는데 문명은 필요없다는 지나친 순수일까. 무엇이든 결과는 순수함 자체이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사는가. 삶이 가난하고 궁핍해질 정도로 순수를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인걸까. 그들은 아마 그렇게 하지 못하면 고통스러울 것이다. 너무 많은 짐을 담아서 눌러도 잠기지 않는 여행 캐리어를 보는 것 같다. 그들의 재능이, 혹은 그들의 삶의 방향이, 아니면 그들의 감수성이 보통의 사람들이 하려는 것을 하게 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기준이 뚜렷하고 그것을 고수하는 완벽주의. 완벽주의가 그들을 힘들게하지만 그들을 살게하기도 한다. 천재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기준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외부의 기준보다는 자신의 기준말이다. 그것을 욕할 수 있을까. 단지 사회와 잠깐 불화한다고 그들에게 그것을 버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을 버리면 그들의 인생은 끝이난다. 오로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것 처럼 그것들을 소중히 한다.
나는 능력에 비해 완벽주의 기질이 조금 있다. 사실 완벽주의라는게 능력이 매우 뛰어나야만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든다. 나는 자신의 능력 한도 내에서 얼마나 최고의 것을 뽑아 낼 수 있는지 따지는 것이다. 사실 외부의 결과보다는 내면의 기준이 뚜렷한 것 같다. 내면의 기준을 지키려 노력하다 보면 세상의 결과와 불화하기도 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합격점을 넘긴 시험에 점수가 생각보다 안나왔다고 기쁘기 보단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를 보며 뭐라 생각해야 할까. 그냥 합격했으면 됐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당시의 오묘한 불쾌는 잔향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사실 나의 완벽주의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과정이 완벽하다면 결과도 좋을 거란 순진한 믿음이다. 대게 그런 것들이 나의 인생에서 빛을 본 적이 얼마나 있냐 생각해보면 없다고도 말 할 수 있겠지만, 그냥 그렇게 살게 된다. 천재들을 보다보면 그런 엄격함에 안도를 느낀다. 내가 천재는 아닐지라도 그런 사람이 항상 존재했다는 생각은 나를 안심시킨다. 적어도 그렇게 살다 죽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니까.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상속된 부를 나눠주어 청산하고, 노르웨이 산골짜기에 들어가 노르웨이어를 배우며 철학하는 걸 보면 순수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 애초에 뭔가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미친 사람이다. 극단적으로 그렇게까지 나아가진 않더라도 그런 기준들이 나를 괴롭게 하면서도 살게한다. 나는 그것 없으면 살지 못하는게 아닐까.
외부 결과에 의존하지 않다 보면 좋은 점도 있다. 결과가 나빠도 버티는 힘이 있다. 그것이 나를 온전히 평가하지 않는다는 오만한 생각일까. 그런 면이 일정 부분 있긴해도 당시의 결과가 나의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다만 그게 나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기에 무언가 도출 될 때 까지 밀어붙이는 힘이 생긴다. 대게 괴롭다. 사실 잘하는 것을 많이 하려한다, 아니면 잘하는 것을 보통 진로로 삼는다 라는 말을 어느 정도 불신하는 편이다. 대게 그런 것은 외부기준에 자신이 취해있는 것이다. 좋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내면의 기준에만 빠져서 자폐적으로 되는 것도 좋지 않지만, 그것은 반대의 극단이다. 자폐적인 반대의 극단이다. 외부성취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극단이다. 어느 정도의 중립이 중요하다. 결과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만, 인생이 공허해진다. 비교하여 오만해지기 쉬워진다. 자신의 잣대가 비어있기에 나를 규정하는 것은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해진다. 결과가 곧 나의 삶이 된다. 사회적 외모가 나의 삶이다. 나에게 덕지 덕지 붙여진 찌꺼기들이 내가 된다. 그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비어있다는 것은 자신만이 오로지 느낀다. 누군가 나의 외모를 비하하면 격정을 내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설명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의미 없는 짓임을 깨닫는다. 그것들은 진실로 그냥 사는데 필요없기 때문이다.
적절한 타협이란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조물주가 인간을 바라 볼 때는 뛰어난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비슷해 보일것 같다. 아무리 극단 값을 가질 지라도 조물주에겐 동등해 보이지 않을까. 자신의 기준이 공고하다는건 괴로울 일도 많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이 견뎌야 하는 외로움이 극심해진다. 외부의 기준은 보편적이라 공감이라도 받는다. 내면의 기준은 발설하기 힘들기에 위로 받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괴로워 한다. 가끔은 별거 아닌 이런 기준이라는 것을 버리고 싶긴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기준을 즐기는 마조히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못 놓는 것은 없다. 컵이 뜨거우면 놓으라는 스님의 말처럼 놓으면 된다. 대게 놓지 못하는 것은 견딜만 하기 때문에 그렇다. 평소보다 극심히 뜨거워도 잡을만한 커피 잔은 존재한다. 한입 쪼로록 마실 때 입술이 데일 것 같아도 뜨거운 걸 잘마시는 사람들은 온도가 어떻든 마신다. 그것을 감내해내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인간마다 다르겠지만 놓지 못하는 것은 즐기는 것이다. 세상에는 보편 기준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것의 공리를 내 맘대로 바꿀 수 있는 면도 존재한다. 세상이 단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내가 갖고 있다면, 내가 그것을 장점으로 만들면 된다.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지나보면 나에게 도움이 된 힘든 일 들이 많았다. 결국 고통을 먼저 받는게 시간이란게 존재한 이상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더 좋은 것들을 하지 못했다고 괴로워 하기보다는 고생하는게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한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에 흔들리기도 한다.
타인과 살아가기에 타인의 기준도 바라봐야 한다. 그렇기에 가끔은 기만하기도 한다. 나도 당신들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식의 내비침을 해야한다. 그리고 그게 틀린 것은 아니다. 오로지 깎이라는 명령이 귓전에 들리지만, 깎이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애초에 대부분이 이행하는 보통교육 중 대안학교로 빠지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은가. 항상 극단값은 존재한다. 세상의 기준에 맞출 수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인건지. 한반에 한 명정도가 극심한 탈선을 겪어 학교를 그만둔다 할 지라도 말이다. 보통의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12반 정도 존재한다면, 대략 한 학교당 36명의 극심한 부적응자와 전국의 중고등학교 수를 곱해보자. 꽤 많은 사람들이 부적응을 겪는다. 군대가서 평균이 이 정도인가를 실감한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이 세상을 얼마나 편협하게 바라봤는지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외부 성과에만 몰두하다보면 이런 맹점이 생긴다. 자신의 주위가 세계의 평균이겠거니 생각해게 된다.
불편하더라도 스스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으니 답답한 기준을 고수하는게 아닐까. 바꾸고 싶다는 의지를 타인에게 말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교회를 안가고 싶으면 안가면 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한다. 신을 믿으라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전도나 권유정도에서 그친다.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건 누가 종용하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은 해봤는가 물어보지만 그것도 비참한 말이다. 가끔은 세상의 소음에 불과한 말인지도 모른다. 꽃이야 팬지도 있고 데이지도 있고 들판의 민들레도 있는 법이다. 어디서 피고 지는 꽃들을 우리가 모두 기억하진 않는다. 단지 그런게 있다고 생각 할 뿐이다. 그러나 마주 보는 순간 견디기 힘들어한다. 같은 종이 아닌 식물이 근처에 생식하면 근처 모든 식물을 살생하는 식물 종이 있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의 극단이 아닐까. 종교의 믿음이 극심해 지면 이슬람 테러단체 처럼 변한다. 그것을 극단적 이슬람주의라고 말하지만 도처에는 그 정도 극단주의야 넘쳐난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에 빠지는 것은 위험하다. 자신의 기준을 확고히 세우든, 외부 기준에 나를 엄격하게 맞추든 말이다. 두 극점은 타인을 살생하게 만든다. 내가 옳기 때문에 모든 현실을 나에게 복속시킨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존재의 블랙홀이다. 모든 것은 나의 질서 내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볼 줄 알아야하고 저렇게도 볼 줄 알아야한다. 가끔은 내면의 완벽주의가 내 삶을 좀먹는다. 가끔은 외부의 완벽주의가 내 삶을 좀먹는다.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시점에서 그것을 바라봐도 불안정한 결과물이다. 무한한 시간이 주어질 지라도 완벽한 결과물은 존재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계속 발전하는 나를 바라보는 것은 완벽에 대한 질주이기도 하지만 항상 나는 완벽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일이 완벽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이면 대부분 느끼게 된다. 알바나 시키는 일을 해봐도 겨우 이 정도로 세상이 굴러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두루뭉술하게 처리하면 상급자에게 혼이야 나겠지만 그렇게 큰일은 아니다. 우리가 외부에서 외식을 하거나 소비하다 보면 이 세상의 짜임새에 놀라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리멸렬하기도 하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을 행함으로서 완벽함을 구사하는 것이다. 공장형 분업이 성행화된지 어언 백년 가량 되었을까. 가끔 보면 분업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나름대로 굴러간다. 물류센터에 영수증 대로 넣지 않아 실수를 해도 세상은 돌아간다. 고객의 짜증을 듣고 상급자의 훈계를 듣고 시정한 이상 그 잘못이 영원하지가 않다.
순백이야 말로 강한 색이다. 빛을 모두 섞으면 투명한 흰색이 나온다. 모든 가능성을 내면에 품은채 세상을 맑게 비춘다. 그것이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편안하게 시신경을 지진다. 그러나 그것을 상기해보면 얼마나 강한 빛인가. 빨간 빛은 빨간색들을 가리운다. 검은색은 모든 것을 가리운다. 그러나 순백의 백색은 모든 것을 내 눈에 비춘다. 모든 것을 내게 보여준다. 마치 신의 편재함을 보는 듯이. 내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우월감을 느끼게 한다. 이 세상이 내 눈 안에 있다는게 가끔은 신기해 보일 때가 있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나에게 허락된 세상이 있는 것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자신의 기준이 강한 것이다. 적어도 내가 말한 바에 의하면 말이다. 그 자신의 기준이라는게 빛이 아닐까. 세상을 비추는 빛. 그러나 자신의 백색으로 세상을 품는 빛이다. 그것이 유색의 빛이라면 세상을 가리운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같은 색으로 지워버리면 된다. 그러나 순백의 빛은 모든 것을 내 마음에 품는다. 신의 품 속에는 모든 어린양이 있다. 세상이 안타깝다는 듯이 에워싼다. 모든 사물을 명징하게 바라본다. 뒤틀린 자신의 고집이아니라, 자연에 가까운 기준의 순수. 그것은 모든 것을 가슴 속에 품는다.
그러나 이날 6월 30일, 완전한 '교육'의 모범으로 이미 십수 년간 교육 칙어에 온몸을 헌신하고 입으로는 충효를 반복한지 어언 1천만 번, 그 사상은 온건하고 올바르며, 그 풍채는 소박 무난하고, 지극한 평범의 극치에 달하며, 평화를 사랑하고 온순함을 존중하는 미덕이 넘쳐흘러, 부인의 엉덩이 밑에 깔리는 것조차도 치욕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력이 있으며, 실제로 지금 이 S 마을에서는 매월 18엔이라는 하는 마을 내 최고의 봉급을 받는 다지마 교장의 한마디에 의해 나는 내 뜻과는 어긋나지만 그 수업을 쉬고, 간접적으로는 다지마 교장 부인의 기분을 맞추어야하는 불명예를 감수하고 교무실 한구석에서 아동 출석부와 눈싸움을 하면서 주판알을 더했다 뺴며, 과거 1개월간의 아동 출석부에 그 합계를 내고 그 비율을 계산하여, 내 월간 보고서 같은 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것만이라면 모르겠으나 성적조사, 결석 이유, 식료품의 휴대 상황, 학용품 공급 상황 등 명목은 그럴싸하지만 거의 무의미한 일이 대부분이다. 이때 나는 느꼈다. 지옥과 극락은 결코 종교가의 방편이 아닌 실제 우리들의 이 세계에 현존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그렇다. 이날의 나는 명백히 교장 선생의 한마디에 의해 극락으로 가던 도중에, 정확해야만 하는 시간마저 속세의 시계와 한 시간이나 다른 이 무더운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 <구름은 천재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윤재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