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의 무위성
이 야외 정원에는 묘한 경계가 있어서, 산책하는 샐러리맨들과 관광버스 승객들 사이에 자연스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샐러리맨들과 오피스걸들의 점심 후 산책은, 마치 도시 풍경화 속의 액자에 들어 있다는 자긍심을 품은 채, 어느 정도 의식을 치르듯 행해지고 있었다.온화하고 반투명한 햇살 아래에서 그들의 위장은 가벼운 움직임을 요구했고, 그들의 위생에 대한 배려심이 발걸음을 이끌었다.신선한 공기, 햇빛, 이삼십 분 남짓의 산책—이 모든 것은 누구에게도 나쁘지 않게 여겨졌고, 심지어는 공짜였다.
- <교코의 집> 미시마 유키오
IMF 시절 아버지들은 일이 없어 공원 벤치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들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막막함은 경험해지 못했기에 함부로 이야기 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공원의 기능을 이야기 하기 위해 꺼내었다. 공원은 공허함의 현신現身이다. 공허함의 육화肉化인지도 모른다. 도심 빌딩 숲의 정중앙에 자연을 보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사실 도시의 공허함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인간의 내면을 더욱 공허하게 하는 장치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여름 피크닉과 연인과의 데이트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실연과 실직의 아픔을 이 곳에서 보내게 된다. 주위 사람들이 해사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고독은 점점 심해져 간다.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 같은 억울함이 밀려온다. 공원은 도시의 공허함을 극대화 시킨다. 어떤 사람이 공원에서 한가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면 어떤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고통을 감내하는지도 모르겠다. 공원을 위에서 조감하면 어떻게 보일까. 까마귀가 공원 위를 날아다니며 인간들의 정수리를 쳐다본다. 그의 눈에는 이거나 저가나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누구나 고통과 환희를 겪어내지만, 위에서 보기에는 둘 다 똑같다. 내가 인용한 <교코의 집>은 전후 쇼와(昭和)시대의 젊은이들이 허무를 어떻게 견디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대략 4명의 젊은이들이 회사생활, 권투선수, 과부, 연극인 등으로 살아가며 연애, 사랑, 고독, 허무, 결혼과 같은 인생 과업을 견뎌내며 그 시절의 고독을 어떻게 견뎌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전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전후라는 건 공허였을 것이다. 그는 극심한 공허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전후의 시대는,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귀머거리 처지에 높여 구경하게 된 임시변통이었다고도 표현 해야 할까. 모든 것에 진실이 없고, 겉치레뿐이지, 아무런 공감할 희망도 절망도 없었다는 것이 당시 나의 진솔한 감상이지만, 1945년부터 60년에 이르는 그 이상한 악시대 조차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일종의 그리움으로 되돌아오니, 형편이 말이아니다. <전후란 무엇인가> 쇼와 40년(1965) 8월
나는 산책을 즐긴다. 도시라면 어딜가나 공원이 있기 때문에 어느 지역을 여행하거나 하면 공원을 찾는다. 어짜피 여행의 쉼은 공원이 담당하기 때문이다. 여행이 아닐지라도 평소 운동삼아 가기도 한다. 도심의 공원은 자연과는 다른 인공물이라서 도시 속에 부유한 자연과 같은 느낌이든다. 인공 호수의 부레옥잠들은 인위적이다. 어딜가서 이런 것들을 볼 수 있을까. 현재 서울 동작구 보라매 공원에는 정원 축제를 한다. 나도 가서 보니 평소의 보라매 공원과는 다른 축제의 분위기였다. 푸드코드가 들어서고 정원 관련 박람회 같이 체험 부스도 늘어났다. 그리고 평소에 못보던 것들이 늘어났다. 아마 공사를 크게 한 것 같다. 주말 보라매 공원은 평소보다 더 붐볐다. 원래도 중앙 러닝 구역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더 많아 보인다. 나는 조금만 둘러보고 철봉으로 가서 매달리며 놀다가 공원 밖으로 나왔다.
걷는다는게 무엇일까. 걸음은 달리기와 연결된다. 달리기의 가장 기초가 된다. 우리는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도 뇌과학자들이 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생리 메커니즘은 아프리카 초원 생활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산책을 나갈 때 블루투스 이어폰을 챙긴다. 나 역시 챙기게 된다. 단순히 풍경을 보고 걸을 수도 있지만,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귀로만 감상하기엔 걷기를 동반하는 것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걷는 다는 것은 인생의 최소 단위이다. 아무 것도 없어도 다리가 있기에 걸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걸으면서 삶을 재고해보게 된다.
걸을 때는 생각이 많아진다. 심각한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 걸을 수도 있고, 단지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어서 달리거나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걷기와 생각과는 어떤 비례관계에 놓여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나는 생각이 많아져서 걸을 때면 속도가 빨라진다. 그리고 자연물을 감상하기 위해 눈을 여기저기 두고 다니면 속도가 느려진다. 오로지 내면세계의 목소리를 들을 때는 외부의 세계가 닫혀버린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지 않아도 가끔은 친구들의 목소리도 못 듣기도 한다.
걸음이 생각을 추진하는 것일까. 아니면 생각이 걸음을 추진하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분간 할 수 없다. 그러나 서로의 상관관계만은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실히 느끼고 있다. 걷는다는 피로이기도 하지만, 건강을 위한 것이다. 운동과 노동의 차이로도 설명 할 수 있다. 우리가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은 육체노동이나 헬스나 같다. 그러나 인식의 차이인지 공간의 차이인지 그것은 다른 일이 되어진다. 사실 힘을 쓰는 요령을 써서 효율적으로 일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육체노동이라면, 헬스는 고립시켜서 근육을 찢고, 적당량의 힘을 줘서 근육을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힘을 쓴다는 조건에서는 동일하지만 공간에 따른 차이가 생겨난다. 우리가 공원을 산책하는 것은 리프레쉬refresh이지만, 일 때문에 먼 곳을 가야해서 걷는 것은 노동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강렬한 햇빛 아래 도심을 걷는 것을 누구나 경험한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짜증과 불만이 섞여나온다. 집에가서 소파에 누워 에어컨을 틀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피어오른다. 그러나 일이 끝나기 5시간전의 오후. 샐러리맨은 불만을 참고 터벅 터벅 나아간다. 우리의 걷기는 이렇다.
공원을 걷는다는 것은 그렇기에 생각이라는 것에 결부된다. 우리는 공원을 걸으면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빌딩숲 안의 인조 숲에서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유일하게 생각에 잠길만한 공간인지도 모른다. 도시의 번잡함은 생각보다는 차안세계에 집중하게 만들어 생각이 피어올라도 방해한다. 태양이 우리의 이마를 극도로 지져댈때 집에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원을 거니는 샐러리맨들의 처지가 이해가 되는 것이다. 삶의 고단함,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명징하게 내 머리속에 상기시켜주는 곳이다. 결론을 도출해주지는 않을 지도 모르지만, 일부로라도 이곳에 와서 정리하지 않는다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된다. 인생의 문제를 직접 마주한다는 자세를 높이 사서 칭찬하기라도 하듯이 자연물들은 우리를 위로한다. 새소리와 풀냄새, 저멀리 펼쳐지는 호수들의 전경을 바라보면 무언가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실 현실의 문제는 어떻게든 풀리기 마련이다. 섣부른 판단이 불러올 안좋은 결과를 생각하며 우리는 벤치에 앉는다. 그냥 자연 속에서 위로 받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이 공원의 옛 터전이 무엇이었는지는 가늠할 수는 없지만, 인공 자연이 우리를 위로해준다. 우리는 자연을 잊어버린 것이다. 우울할 때 돌아갈 대자연의 품을 잊어버렸다.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품에 나와 아내에게 안기는 가장의 모습이 우리가 아닐까.
공원은 그렇기에 허무의 장이다. 도시문명이 허무하다면 공원은 더 허무하다. 어디선가 허무함을 쓸어모아 이 인공 자연물들 사이사이로 담아두었다. 우리는 이 곳에서 허무함을 느낀다. 연애, 사랑, 일 등 모두 불교적 관점에선 공空한 것이지 않은가. 누군가 연정을 나눈다면 누군가는 실연했다. 그런 허무의 총체가 공원이다. 공원은 태허太虛이다. 모든 것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비어있는 태허이다. 말그대로 이 곳은 가장 비어있는 곳이다. 어느 대자연 보다 인위적이고 화려한 자연이다. 분재와 같은 자연. 누군가가 의도대로 설계한 자연이다. 대자연의 품을 잊었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설계안에서 위로 받는다.
그러나 이런 허무의 장에서도 우리는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한다. 다시 일어설 용기, 앞으로의 인생 계획 등을 여기서 짤 수도 있는 것이다. 허무하기에 공원을 거닐지만, 극복하기 위해 거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원은 극복의 장이다. 허무한 인생을 다시 살게하기 위해 우리는 걷는다. 다시는 바보같이 살지 않겠다며 공원을 나오게 된다.
산책자는 고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걷는지도 모른다. 다리의 근육통이 우리의 정신을 북돋우기 때문이다. 인생이 무위하지만 걷기의 고통은 그것을 극복하게 해주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