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의 권력론
서점에 가면 책을 고른다. 책을 어떤 식으로 고르게 될까? 사실 생각해보면 책에 대한 외양을 심히 따진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서점에서 책을 모두 읽지 않는다면 그 책을 온전히 모른다. 일정 부분 읽어서 맘에 들어 살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는 책들은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책의 외모를 심히 따진다. 책의 외모에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디자인의 상태를 보면 최신 출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대게 좋은 출판물들의 디자인들은 디자인팀도 강력하게 따라붙는지 책의 내용도 좋은 경우가 많다. 사실 디자인이 좋아서 샀는데 내용도 좋더라가 반복되는건지, 디자인에 의해 내용이 좋은게 미화되는 건지 분간하기는 힘들다. 느슨한 상관관계만이 존재한다. 디자인이 좋지 못할 지라도 내용에 감동하거나 얻어갈 것이 많은 책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내용을 부분적으로나마 읽어보고 사야한다. 나는 사실 미감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인 것 같다. 디자인을 안보려고 해도 따지게 된다. 다른 모든게 좋아도 디자인이 별로면 좀 꺼려지게 되는 면이 있다. 게임을 하는데도 그래픽 수준을 따지는 거라 보면 된다. 대게 서양인들이 만든 게임들은 그래픽이 좋다. 배틀필드나, 러스트 같은 게임을 생각해보라. 서양인들이 얼마나 그래픽에 치중하는지는 게임 유저들이 알고 있다. 리그오브레전드에서는 스킨이 항상나온다. 스킨이 미치는 영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더테일 같은 그래픽보다 내용과 컨텐츠에 중점을 둔 게임도 서양에서 나온다. 언더테일이 초딩용 게임이라고 놀림을 받긴하지만, 나는 꽤나 재밌게 플레이 했었고 엔딩도 보았다. '와 샌즈'는 어느정도 과장된 면이 있다. 옛날 도트 그래픽이 주는 분위기와 스토리 그리고 컨텐츠가 주는 힘은 그래픽보다 강하다고 느낀다.
몇 세대 아이돌이 교체될 때 마다 새로운 세대의 아이돌들은 인물이 없다며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샌가 살펴보면 그들이 시대의 미를 대표하는 아이돌이 되어 있다. 나는 아이돌을 잘 모르지만, IVE를 볼 때마다 예쁘다고 느끼긴한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를 대표하는 미가 존재할지 몰라도 본질적인 미라는게 존재하는가이다. 빌렌도르프의 여신상을 바라보자. 그 원시시절의 여성의 아름다움은 풍만함이었다. 대게 가난한 국가들의 여신상은 풍만함이다. 풍만함이 그들의 부를 과시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미녀상들은 어떨 때 보면 우리와는 다른 느낌이 있다. 인도 영화의 여주인공들이나 광고 모델들이 우리의 미적 기준과 다른걸 보면, 미라는건 항상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에타 석상은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성모마리아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지금 시대의 미적 기준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전적인 미로 보여질지라도 본질적인 면은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외모를 판단할 때 건강함을 보게 된다. 건강함이 본질적인 자연의 미라면, 문화적으로 쌓아간 미라는게 존재해서 우리의 미감을 지배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나운서나 승무원들의 외모가 본질적인 미에 가깝지 않나 생각이 들긴 한다. 기본적으로 호감을 주는 외모가 가장 본질적인 외모의 측면인 것 같기 때문이다. 미의 기준은 계속 바뀌지만, 그것은 미의 문화가 바뀌는 것이다. 잠시 우리의 미학적 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미디어이다. 예전에 미라는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을 받은 유명인도 어느샌가 보면 외모로 추앙받는다. 그것은 미의 기준이 바뀐 것이다. 물론 사람의 다른 측면이 외모를 돋보이게 하기도 하지만, 외모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게 크다.
외모는 편견으로 작용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어떤 편견으로 추상화된다. 편견은 자신을 가속한다.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데이터가 쌓여나갈 수록 판단의 속도는 빨라진다. '외모가 별로인 사람들은 이러저러 하다.'는 판단은 믿음에 가깝지 진실은 아니다. 관상론을 불신하는 이유이기도하다. 그런 경향성이야 있는지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그것을 분석해보면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간파 할 수 있다.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논리가 쓰여질 뿐이지, 그것이 논리적인 명제는 아니다. 미학은 생각보다 논리에 종속된다. 미학적 체계라는 것은 판단의 불가침성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문제가 생겨난다. 가장 논리적일것 같지 않은 분야이지만, 해외에서는 철학 분과 중 분석미학이 유행하는 것 같다. 미학은 판단이 불가피하기에 논리를 호출한다.
외양을 무시하긴 힘들지만, 언제나 여백을 남겨놔야 한다는게 나의 지론이다. 아름다움은 편견의 가속화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미학 체계에 귀속시켜 판단을 가속화한다. 말이 어렵지만 풀어보면 이렇다. 못생겨서 성격이 안좋다. 이런 말들 말이다. 그것은 믿음의 영역이지 자연적으로 도출되는 논리적인 귀결이 아닌것이다. 인간의 감정이 이성보다 앞선다는 현상학자 막스 셸러의 이론은 타당하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감정으로 타인을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형이상학 체계에 맞지 않아서 잠깐 불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헤겔의 절대성이 비판받는 것은 그것의 닫혀있음에 있는지도 모른다. 열려있는 형이상학은 불화를 겪을지라도 수용한다.
미라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작용한다. 유태인을 차별한 나치의 경우, 일제가 조선침략을 정당화 할 때 조선인들의 외모를 구분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미라는 것은 자신의 판단을 강화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변모한다. 어찌보면 응용미학의 측면도 있다.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미 체계에 종속되는지 아닌지로 타인을 판단한다. 그것에 부합하지 않으면 열등하고 아름답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아름다움에 대해 열려 있어야한다는 논리적인 귀결이 도출된다. 사실 이것 조차 믿음의 영역이다. 논리적인 영역에서 당위성을 뽑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논리적인 법체계에 부합하는 미학적 판단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믿음을 고수 할 수 밖에 없다. 자연의 기준으로도 그것이 미학체계에 부합하지 않을지라도, 미학의 논리성에 의해 법에 귀속된다. 우리는 법의 통제하에 살아가기에 이런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는건지도 모른다.
미라는 것은 그렇기에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이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그러나 귀납만으로 도달하는게 과학은 아니다. 실증할 이론이 필요하다. 그것이 형이상학이다. 미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대단한 것들은 얼마나 도처에 남겨져 있다. 그것들을 배제하는 형이상학은 자신의 세계 포섭 가능성을 자기 발로 차버리는 꼴이 된다. 형이상학의 목표란 보편성 아닌가. 자신의 발로 보편성을 차버리는 형이상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형이상학은 편견이 되고 폭력이 된다. 아름다움은 폭력에 가깝다.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용하지 못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불편할지 몰라도 그것의 속성은 폭력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기회의 박탈, 기회의 쏠림 등. 유무형의 아름다움이 가져가는 것들이 타인에게 박탈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행위하지 않고도 앗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