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하는 자의 슬픔
심지어 순수한 대수라고 불리우는 것에 따른 진실이 흔히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진실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런 가정엔 너무나도 큰 오류가 있어. 그리고 이 오류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난 그런 오류가 어떻게 그렇게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는지 황당하기만 하네. 수학적 공리는 결코 일반적 진리의 공리가 아닌 것이네. 등식에서 적용되는 진실, 그러니까 형태와 양에 관련해서 적용되는 진실은, 예를 들어 윤리에 적용하면 완전히 틀리는 것이 보통이지. 윤리에서는 부분이 합쳐지면 전체와 같다, 라는 명제는 보통 틀린 것일 경우가 많아. 그 공리는 또한 화학에도 적용되지 않지. 동기를 고려할 때도 그것은 들어맞지 않아. 일정한 가치를 지닌 두 동기를 합한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그 동기들이 따로 가졌던 가치의 총합에 해당될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등식이라는 한계 안에서만 진실인 수학적 진실은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 - <도둑맞은 편지> 에드거 엘런 포 전승희 옮김
어짜피 읽을지 안읽을지도 모를 편지를 왜 쓰는 걸까. 사랑의 도달을 소망하는 사람의 슬픔이다. 아니면 자신의 편지는 기도인지도 모른다. 닿는지는 몰라도 그렇길 바란다. 그러기에 쓰는지도 모른다. 편지를 써야만 나의 근심이 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지가 가지는 닫혀있는 성질은 뭔가 사람같다는 생각이든다. 편지를 받아 읽는 사람에게 사유하게 만든다. 그리고 글의 폰트와 내용이 독자에게 마음의 울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지는 주체가 아니다. 그것을 주체로 치부하기에는 단순화 된 넓은 의미의 주체인지도 모른다. 주체의 기준을 인간으로 잡는다면 편지는 결코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편지가 가지는 자기소멸성. 즉, 편지 글 내부에서 짜맞춰지는 내용들은 편지 안에서만 허락된 논리 구조물이다. 우리가 편지 바깥의 상황을 추측하는 것은 모호한 판단에 내맡겨진다. 편지의 단서만으로는 현실을 규정할 수 없다. 저 사람이 편지글에 사랑한다는 말이 써있지 않으면, 정확하게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랑의 분위기가 넘쳐흐르는 편지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명확하게 명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외부적인 유추에 속한다. 편지는 연역이다. 외부의 개입이 존재하는 연역이란 존재하지가 않기에, 외부의 것들을 단절 시키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맞는 처사이다. 그러나 인생사가 그렇게 굴러가지 않기에 우리는 편지 밖의 것들을 비논리적인 구조로 넘어가 추론해내기 시작한다. 비정형적인 논리 추론의 연쇄라는건 인생의 슬픔이다.
편지를 완성한 이후 편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사실 쓰여진 이후의 편지는 나의 일부 조차 아닌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사실이나 진심을 전달하는 보편적인 의미의 편지일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쓰여진 이후 타자 취급을 해야한다. 타인에게 단서를 제공하지만 논리적으로 제한적인 그림만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그 그림 조차도 타인에게는 왜곡되게 보여지게 된다. 연역이라는 것은 동일자의 내부 구조에 맞춰진 논리 추론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가지는 내부 구조가 우리와 같은지는 모른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우리를 괴롭게 한다. 편지는 타자에 속한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나를 보여주는게 아니라 나의 연역 구조의 일부분을 전달하는 것이다. 수학적 귀납법으로 명제가 성립하는 것은 알게될지 몰라도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알 수 없다. 도구의 사용가능성의 여부가 주체의 판단여부가 아닐까. 편지는 그렇기에 주체가 아니다.
편지에 대해 생각하면 할 수록 쓰기가 어려워진다. 그것은 타인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수시로 따져보는게 편지 쓰기의 괴로움이다. 타인의 내면 구조를 우리가 모르지만, 보편적인 상식에 맞춘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타인이 우리에게 관대함을 베풀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누구도 편지에 대해 자신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절되어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경험되지 안기 때문에 우리의 기준은 정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관계의 모순이 넘쳐나는 것이다. '이 정도 썼으면 이해해주겠지'는 엄밀하게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타인이 우리를 너그럽게 바라봐 주기를 고대하는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편지를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괴로워진다. 오히려 편지란 감정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편지란 내맡기는 것이다. 이미 내맡겨진 편지에 대해서 우리는 수정이 불가능하다. 연인관계를 정리할 때 편지를 타인이 찢어버리든 말든 내 알바가 아닌 것 처럼. 우리는 감정을 타인에게 내맡긴다. 편지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감정을 내맡겨서 공감을 강제한다. 그것이 공감되어질지, 아닐지는 타인의 판단이다. 따라서 편지란 이성으로 포착 될 수 없는 타자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연역은 내부의 논리이지 외부의 논리가 아니다. 귀납적인 추론으로 외부의 기준을 어느 정도 설정할 수 있겠지만 완벽하진 않다.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과한 이성을 편지에 부여하는 것은 편지 쓰기의 실패인지도 모른다. 시원하게 쓰고 내맡겨버리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편지에 대해 생각할수록 괴로워진다. 바보는 편지를 잘 쓰는 걸까. 이성보다는 감정에, 감정보다는 용기의 영역이다. 어설픈 용기를 내지말라고 듣는 시대이지만, 그런 용기가 주위에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을 불편해하는지도 모른다. 편지라는 것을 거의 쓰지 않는 요즘은 말이다. 연인과의 이벤트나 스승의 날 같은 날에만 편지를 쓰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제 어설픈 타인의 감정과 용기에는 관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담이라는 명목 하에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용기가 이 시대의 미덕이 아닌것이지, 주체들의 용기가 지워진게 아니다. 용기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편지는 어떤 의미에서 기만이다. 나를 보여주지 않고 매개물을 통한 기만이다. 그것이 나를 보여주지 못할지도 모르는 닫힌 연역구조의 타자인데, 타자를 통해 타자를 설명하는 꼴이 된다. 기만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렇기에 지친다. 자신의 어떤 것을 보여줘야 할 지 선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친다는 것은 주체의 고갈을 의미한다. 지나친 편지들은 주체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는 편지를 전하지 말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