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없는 그림
3학년이 된 봄날 아침, 등굣길에 붉게 칠해진 다리의 둥근 난간에 기대어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다리 아래로는 스미다 강과 비슷한 넓은 강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완전히 망연자실한 경험은 그때까지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언제나 여러 가지 포즈를 취했다. 나의 세세한 몸짓 하나하나에도, "그는 당혹해하며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는 귀 뒤를 긁으면서 중얼거렸다"라는 식으로 일일이 설명을 붙이고 있었기에, 나로서는 우연이라든지 자신도 모른다는 동작은 있을 수가 없었다. 다리 위에서의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깨어난 다음, 쓸쓸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기분일 때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또다시 또 몽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숨을 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쓰가루> 다자이 오사무 서재곤 옮김
그런 천재라면 모를까, 보통 두뇌를 가진 사람은 배우는 단계에서 창조의 단계로 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 계기를 잡기까지 나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지 않았으면 안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 과정에 진학한 후, 동기생들은 각자 논문을 쓰고 발표하게 되었다.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다든가 혹은 어려운 이론을 이해했다고 해서 스스로 만족하던 시절은 지나가고, 무엇인가 창조를 해야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수학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이상 책을 읽고시 "옳지 알았다."라는 말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학문의 즐거움> 히로나카 헤이스케 방승양 옮김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다. 애초에 훌륭한 사람이란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에 사족이 필요하진 않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도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다. 지배의 논리에 의해 판단의 기준이 생겨난 것이지, 그것에 얼마나 부합하느냐가 본질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기준이란 것이 없으니 겸손도 오만도 존재하지 않아진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을 낮추면 겸손으로 보고, 누군가 자신을 치켜세우면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 마다의 시점이 존재하지, 본질적으로 오만과 겸손이 자연에 내재하는 속성임은 틀림없이 아닐것이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런 것들이 자연의 속성이라도 된 것 마냥 착각하게 될 때가 많은데, 그것은 비교함에서 따라나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치를 전도시켜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특질이 세상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자신만이라도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가치 체계들을 만들어낸 창조자 격의 인물은 이런 가치전도를 했어야 했다는 걸 상기해보자. 그것은 어려운일이다. 그러나 시스템 안의 온기 속에 유약해진 식물 마냥, 우리는 겨울의 냉기를 견디지 못한다. 허무라는 냉기말이다. 허무를 직시하고 가치 체계를 스스로라도 전복시키고 싶지 않아하는 유약함이 존재한다. 자신이 그것에 맞지 않는다면 떠나거나 생각을 바꿔버리면 된다.
맞지 않은 옷을 입는다면, 맞는 옷을 입으면 된다. 그것의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할 이유는 없다. 사실 내가 그 옷을 입어야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면, 자신의 세계에 오히려 빠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꿀 수 있는자들은 여유가 있다. 그러나 맞춰야 된다는 생각은 여유는 없는 생각일 수 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공감을 말하지만, 대부분은 그 옷이 좋다고 입으라고 한다. 그것은 진심으로 회의하지 않은 것이다. 회의하는 것에는 현실과 타협이라는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술을 많이 마셔서 간암에 걸렸는데, 술 때문에 그래도 인맥을 넓힐 수 있었다고 남에게 그래도 마시라고 말하는 거랑 같다. 운 좋으면 간암 안걸리잖아? 그래도 사회생활 하면서 술을 안마실 수는 없잖아? 진심으로 회의하는자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에는 타협이란게 없다. 술마시기를 진심으로 회의한다면 남에게 보통 이렇게 말한다. 술 마시면 너를 쥐어패겠다고. 그 사람을 아낀다면, 혹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타인에게 그렇게 말 할 것이다.
자신이 무언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보통 그 느낌이 옳은 경우가 많다. 자신의 내면은 자신만이 알기 때문이다. 그걸 타인이 판단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이 틀릴 가능성도 염두해둬야하지만, 그것에 대한 판단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 대한 정보량이 그렇게 많지 않아 확실치 않더라도, 그것에 대한 직관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깎이는 마음은 애초에 그것이 깎이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다. 산도 깎다보면 더 이상 안깎일것 같은 화강암 지대가 나온다. 그게 깎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깎는데 다른 산 보다는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드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기보다는, 인간의 생이 유한하기에 포기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직관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직관을 유기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과 동치인 것이다. 대부분의 일들은 직관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정보량이 극한으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생 경험을 통틀어서 우리의 뇌는 미래의 청사진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약간의 설계도가 주어졌지만, 애써 무시하고 조립하려는 고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사실 이 사람들에게는 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여기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적어도 인생을 후회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가 최고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의 인생관에 대한 옳고 그름을 보류하고, 이들에게는 삶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게 없다. 나도 이런 쪽에 속한다. 과거가 힘들었든, 과거가 치열했든 말이다. 대게 젊은 시절이 그립다는 것은 그 때가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년의 행복이 그렇게 좋은 경험은 아닐 수도 있다. 시간이 존재한다면, 고통을 먼저 받는 쪽이 유리한게 인생이다. 불교에서 고통 = 쾌락 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면, 왜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비유하는 것일까? 인생은 쾌락의 바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번째로, 앞서 말한 것 처럼 시간이 존재해서 순서가 생긴다. 두번째로, 우리의 생리 메커니즘이 쾌락에 취약하다. 사실 두번째는 첫번째에 종속되는지도 모른다. 사건의 전후과정이 선명하지 않은 시간 이전의 세계에서 쾌락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그것은 한쪽으로만 경도되어 있다. 그것에 대한 애초에 고통은 삭제되는 것이다. 시간이 존재한다면 선후 관계가 생기고 쾌락과 고통간의 단절이 존재할지언정, 언젠가 오는 낮과 밤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가 고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쪽으로 발달했기에, 우리는 시간 안에서 고통을 먼저 받는게 유리해는 것이다.
뭐든지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안다는 선에서 그치기 마련이다.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타인의 문제에 시달리는 것은 타인이라는게 경험되지 않는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고통의 총량을 타인과 양적으로 비교 할 수 없다. 미래에는 그런것이 가능해질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현시점에서 감각질의 동일성을 증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보인다. 타인을 신뢰하기 힘든 이유는 이런 감각의 비동일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실재의 속성이 무엇이든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수도 있다. 우리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봐야 아냐고 묻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애초에 실증한들 결과만 같다면 무슨 소용인가. 가끔은 모르는 것에 대해 믿거나 직관을 신뢰하는게 필요하다. 논리는 때로는 부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한다. 그렇기에 모든 일을 따져보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자신의 특징이 무엇이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지나친 분석이 주체를 부정적으로 만든다. 이성의 속성은 사탄이라는 기독교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말이다. 온전한 믿음이 가능할 때 우리는 비로소 편안해진다.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두드리지 말아야할 불문율이 자연에는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타인에 대해 안다고 생각 할 이유도 없고, 애써 이해하려고 지나친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될 지도 모른다. 어짜피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기준을 세워 타인에게 공감할지라도 그것은 어설픈 공감으로 남게된다. 그냥 모른체 지나가야하는 경우도 가끔은 생긴다. 운다는게 부정적인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우는 것을 안좋은 일이 있냐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려드는 것이 오히려 사탄의 속성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감정의 발현이란 신의 속성이다. 내면의 믿음과 감정의 합일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합일이 이루어져 자연스레 눈물이 나온다. 그것을 어설픈 지향성을 가지고 위로한답시고 다가간다. 그것은 루시퍼가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자는 이미 그들의 천국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