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철학
고등학생까지는 성실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과거부터 들었던 생각이지만 가끔 보면 성실함은 위험하다. 중학생 도덕 교과서 부록에 나치 전범자들의 말 들을 수록해 놓은 교과서가 있었다. "나는 당국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라는 말들이었는데, 이런 내용을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공교육에서 가르치는게 모순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는데, 그 중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예가 하나 있다. 일제시대 자신의 승진을 위해 총독부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던 조선인 공무원은 일제강점기가 종식되니 친일파로 몰려버렸다. 이 사람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을 뿐인데, 왜 이런 결과가 생겼냐는 말이다. 따라서 그냥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재수없으면 성실하게만 살다가 골로 가기 쉽상이다. 시스템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으면, 성실하기만 한 사람들은 재수없으면 사지로 몰리기도 한다. 결국 그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거나 처벌을 받는다. 개인의 성실성을 증명하라는 시대의 요구를 항상 듣지만, 그렇기에 꽤나 이상한 말이다. 성실하다는게 좋은 쪽으로만 쓰이는 것은 지금의 시대가 그것을 강력하게 원하기 때문이다. 창의성을 요구하지만 관리가능한 창의성을 말한다. 창의성은 어쩌면 시대를 바꾸려는 혁명가의 폭력일 수도 있다. 그것을 공교육이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창의성을 추구하는 교육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교수나 교사들은 창의성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는다. 싸가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맞는 말이긴 하다. 지식을 체화하고 암기하는 것 외의 것들은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창의성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명목상 좋은 말로 포장하고 싶은 시대의 아픔인지도 모르겠다.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을 욕하지만 그렇기에 굴러가는 면도 있는 법이다. 세상이 혼란하면 살인이 정당화 될 수도 있다. 인류의 도덕이 무너지는 순간은 이런 전국시대의 풍경이다. 영웅은 이 시기에 나오는 법이다. 지금의 시대에 영웅이 없다고 욕하고,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을 쉽게 욕하지만, 그런 시대일 수록 살기는 편한 법이다. 복지부동에 대해 그렇게 욕할 만한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라는 말이 진실로 옳기 때문이다.
예전에 페미니스트 비판으로 유명해진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이 군대나 학업에 대해 학술적인 결과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것은 군대나 학업의 평가에서 가장 적절한 것은 성실성이라는 것이고, 창의성은 오히려 음의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말이다. 너무 혁신적인 결과들은 오히려 석사과정을 그만두라는 지도를 내릴 수 밖에 없다는 예를 들면서 창의성에 대해 다시 재고해야 한다는 유튜브 영상이 있다. 성실성을 본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시스템 내에 얼마나 순응할 수 있냐를 보는 것이다. 순응이라는 말이 이 시대에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가치 판단이 들어있지 않다. 조조 밑의 책사 순욱은 주군을 위해 순응한다. 오히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는 순응이 흔하지가 않다. 누구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설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삼국지를 보면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장수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빈 찬합을 보고 주군의 뜻을 헤아리는 순욱의 마음은 이 시대에 불쾌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시대에 너무 흔해 빠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시대에 드문 것은 전국시대적인 혁신이기에, 그런 창의성이라는 입 발린 말들이 넘쳐나는지도 모르겠다. 둘에 대해 너무 안좋게만 바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이 과잉되어 있는지만 관찰할 뿐이다.
그러나 비판받아야 할 만한 것은 이 시대에 과잉 되어 있는 성실성이다. 뭐든지 과잉 되면 비판받기 마련이다. 우리는 파리 떼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파리가 과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콩나물 시루를 사면 콩나물 하나 쯤이야 하수구에 들어가도 모른다. 하나하나 신경쓰는 것은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창의성을 요구하는 것은 창의성이 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흔하지는 않은 것이다. 다이아몬드나 희토류의 희소함과 닮아 있다. 전국시대의 창의성의 폭력성은 지나서야 비판받는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가 과한 성실의 시대이기에 오히려 이 시기가 끝나가면 성실성은 비판받을 준비를 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마냥 성실함을 따지는 척도에 대해서 약간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대가 바뀐다면 재수없으면 우리의 뒤통수를 후리고, 정말로 재수없으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거나, 감옥에 투옥되거나, 타살로 죽을 수도 있다. 이것이 그렇게 극단적인 말은 아닌 것이, 정치인들의 투옥을 바라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실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노년에 감옥에 투옥 될 줄 꿈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성실하다는 칭찬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개성있다, 약간은 또라이 기질이 있다 이런 식의 칭찬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것은 성실하다는게 과해서 그렇다. 누구나 성실하기에 차등을 두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성실하다는 말이 변색이 된 것이지만, 그렇기에 겉보기에 성실하다는게 좋아보이는 평가가 아닌 것 처럼 보이는 아이러니가 생겨난다. 선생님들이 생기부에 적을 것 없을 때 성실하다고 써놓는 경우말이다. 성실함이 너무나 흔해빠져서 무관심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실함은 중요하다. 자신의 내면의 기준에 맞는 성실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창의성도 중요하다. 더욱이 성실성만 증대되는 이 시대에서는 말이다.
정확한 문제는 창의성이라는게 진심에서 우러나온게 아닌 기만적인 전술로 사용된다는 것에 있다. 그냥 단기 이익을 가져와줄 약한 정도의 창의성만을 바라면서 대대적으로 교육에 창의성을 풀칠해버리는게 좋은 것인지는 재고해야한다. 창의성은 교육이랑 반대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부정적인 속성을 간파하지 못한채 순진한 정책 입안은 부유할 뿐이다. 오히려 표면적으로는 나를 죽이시오라고 말하는 꼴이 되버린다. 관리가능한 창의성이라고 명확히 명시했다가는 자신들의 체계 장악력을 설파하는 꼴이 되버리고, 지금 처럼 창의성을 말하자니 시스템 내에 해가 되지 않을 성과 중심의 창의성을 말하게 된다. 그렇기에 창의성을 바라는건 모순이다. 그냥 시험으로 키워내기는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시대에서는 성실성만이 증대된다. 뭐 성실하니 뭐든 잘하겠지라 퉁쳐진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야 인사부처들은 느끼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재능이라는게 천차만별인데, 성실하기만 한 사람들을 쓰는게 옳은 것인가라는 생각은 어딜가나 존재하는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성실하기만 한 사람도 없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사고체계가 오로지 한쪽으로만 경도되어 있기 때문에 능력의 제한이 생기는 것 같다.
그렇기에 둘의 쓰임에 대해서는 적절히 생각이 필요하다. 성실하다는게 순응의 덕목이지만, 오히려 과해지니 폭력이 된다. 뭐든지 사회생활을 하려는 형식으로 일처리를 마감하다 보면 문제를 덮어놓는 꼴이기 때문이다. 복지부동의 장점은 편하다는거지만,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덮어 놓은 뚜껑안에 우리를 잡아먹을 괴물을 키우는지도 모른다. 성실하다는게 마냥 좋은 말은 아님을 상기시킬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좋은게 좋은거라는 말이 이 시대의 선전이다. 그러나 애초에 엄밀히 말하면 좋은것도 나쁜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의 가치 판단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렇기에 시대가 바뀌면 우리는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성실하지 말아야한다. 가끔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