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컬(cynical)하기의 어려움
나의 글을 읽다보면 무언가 철학적인 색채를 띠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것이 부끄러워 질 때가 있다. 그것은 물리를 물리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슬픔이다. 추상화의 그림은 물자체의 세계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세계는 맞다. 나의 세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인지 대상을 묘사하는 글쓰기를 할 수가 없어진게 아닌지 가끔은 후회되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이라는게 얻어가는 것도 있지만, 어떠한 측면에서 퇴화라는 것을 상기해보자. 나는 구체적인 풍경을 그리는 대신에 사변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변이라는게 이야기할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있다. 고대 철학에서는 우리의 사고의 원류를 볼 수 있다. 아주 간명하고도 대화체 형식으로 말이다. 인류가 4천년 이상을 거듭해서 올라가지만, 문화의 세련됨이 더해져서 새로운 담론이 더해질지언정 그것의 본질적인 텍스트는 같은지도 모른다. 다른 입각점을 생성하는 무한대의 글쓰기인가. 철학이란 그런것 같다. 푸코의 말마따나 에피스테메의 존재를 항상 느껴야 한다. 수학적인 글쓰기란 그런 것이다. 같은 대상을 볼지라도 기하학으로 볼 것인지, 대수로 볼 것인지, 확률론적으로 볼 것인지 등.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그림은 같다는걸 항상 생각해야 한다. 본질에 대해 도달 할 수 없다면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다. 소설 읽기의 어려움을 말해보자. 오히려 현대적인 소재를 가미한 현대 소설들이 읽기도 선별하기도 어렵다. 우리에게 확정적으로 정해진 것은 고전이다. 그것들은 적어도 몇 십년에서 몇 백년을 혹은 천년 이상을 살아남았기에 우리에게 선별과정의 괴로움을 안겨주진 않는다. 그러나 현대 소설이라는 것은 범람하기에 그것을 선별하기 괴로워진다. 오히려 고수의 영역이다. 마치 현대 추상미술을 보는 것 같은 안목이 필요하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할지언정 고전에서 길어올린 판단력을 가지고 현대소설을 바라봐야한다. 앞서 말했듯이,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않고 그것이 문화적인 담론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표면적인 이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깊게 들여 볼 필요는 없을 수 있으나 그것은 위계를 말한다. 인간이 타인과 차별을 두고 싶어하는 것은 이런 위계의 차이가 아니던가. 남과 비교하는 습성을 과감하게 드러내려면, 위계의 존재를 인식해야한다. 철학이란 위계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체계에 대한 범주론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철학인지도 모르겠다.
진리를 대하는 니체의 태도를 상기시켜 보자. 그는 진리가 여자라면, 과거 철학자들의 남성적인 진지한 꼬드김 때문에 오히려 도달하지 못하고 좌절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조차 전도시켜 보고 싶은 것이, 이제는 그런 가벼움만이 증대된 시대이기에 변증법을 초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시대적 요청은 필연적인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설픈 남자들의 플러팅이든, 여자를 대하는 카사노바의 농밀함이든, 그것들이 이제는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변증법을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나는 어떤 생성의 철학을 말한다. 앞 문단에서 주지하는 문화의 덧씌워짐을 말하는 것이다. 사고의 원류는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인류가 생각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체는 이미 다 나온지도 모르겠다. 인류의 기술 발전이 앞당겨질 수록 그런 생각은 가속화 된다. 오로지 물질만이 새롭다. 새로운 생각이 이제는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로켓을 타고 화성에 가고자 하는 일론 머스크의 야망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이젠 철학자들의 구닥다리 언설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에, 기술과 과학의 발전만을 추동하는지도 모른다. 류츠신의 소설 삼체에서는 몇 백년이 지나도 현대물리학의 이론이 진척되지 않는다는 묘사가 나온다. 앞으로 실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론에 천착하는 사람들이 점점 소수에 남겨져 타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이론 없는 실증이라는 것은 학문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진리를 여자로 보든 남자로 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단지 초월하기 위해서는 생성해야 한다. 문화가 달라질 때마다 우리는 생성해 낼 수 있다. 이미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점점 내면은 공허해져 간다. 이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의 수는 점점 적어지기 때문이다. 실적과 성과만이 증대된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모르지만 상관에게 결제 서류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만하기 떄문이다. 유나바머가 기술 발전을 막을 수 없는 재앙이라고 본 것은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들을 막을 수 없다고 체념하기 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기술 발전이 초래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그것이 오히려 기술 발전을 막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하지만, 인간은 늘 적응해 왔다. 따라서 기술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을 항상 만들어 내야 한다. 아마 기술이 문화가 되지 않을까? SNS없는 시절을 우리는 이제 상상하기란 불가능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은 문화가 된다. 나는 삐삐시절을 모르지만 그들만의 문화가 존재했지 않은가. 기술은 따라서 이제 문화의 측면이 강해진것이다. 기술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그것을 관조하여 생각을 지니는 것이 합당한 결론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철학이라는게 추동된다. 철학이라는 것은 그냥 모든 물자체의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 내면세계에 한정에서 대상을 인식 가능하게 하는 체계로서 작용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사과라는 언명 아래에 여러 감각질(맛, 냄새, 시각, 소리) 등을 포섭시킨다. 목차나 범주의 역할이 철학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무리 형이상학을 최소화시켜도 현상학에 그치기 마련이다. 그것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가능하다면 애초에 학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를 읽다 보면 그런 범주론적인 생각의 극한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범주 사이의 범주들도 생각 할 수 있다. 그것을 메타-형이상학이라고 분류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것 조차 자신의 형이상학에 내재한 성질이다. 더 이상 복소수 이상으로 확장가능한 수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 마냥 철학도 메타 형이상학 이상으로 갈만한 곳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내재성이란 모나드 안에서 바라본 바깥이다. 바깥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 내면세계의 체계 안에서만 기능하기 때문에 외재성이 아니라 내재성으로 불리운다. 외재성이 우리에게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살펴보면, 오로지 내재성으로 인한 판단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바깥에 대해 판단 할 수 밖에 없다. 레비나스의 지향성 마냥 우리는 외재한 것들을 경험하기란 불가능하기에 우리의 잣대를 설정해서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에게는, 혹은 다른 모나드들에게는 어떻게 감각되어지는지 알 방도가 없기 때문에 철학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생성의 철학이라는 것은 따라서 유아론적이지만, 닫혀있지만 열려있다는 역설적인 말로써 밖에 유아론을 탈피하게 된다. 우리는 유아론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대부분의 학설은 유아론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것은 주체의 관여가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생겨나는 사탄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을 지우기 위해서는 완전한 대상의 지각이 필요하다. 그것이 언제쯤 가능해질지는 요원해 보이지만 인간은 기술이 그것을 도달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판단은 유보 할 수 밖에 없다.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물질만이 증대되기에 우리는 이론에 대해 천착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나친 가벼움이기도 하다. 유물론을 토대로하는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항상 말하면서 우리는 유물론에 천착하는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비판 담론이 항상 나오지만, 우리는 뭐든지 가능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뭐든지 가능하다는 목소리가 너무 많이 나오기에 그런 것이다. 뭐든지 가능하다는게 뉴프론티어 정신의 모체라면, 철학은 그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 그건 좀 지나친 생각인 것 같은데? 그러나 이제는 이런 생각조차 말소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술이 증대될 수록 오히려 노동은 늘어만 간다. 기술이 노동을 해방시킨다는 특이점을 외치지만, 오히려 추상적인 사무작업들은 복잡해졌다. 컴퓨터가 과연 일들을 더 간단하게 만들었을까. 가끔은 생각해보게 된다. 오히려 메신저의 기능이 중요해졌고 우리는 타인의 메신저 때문에 항상 시달려야 한다. 기술은 오히려 노동을 증대시키는 면도 존재한다. AI가 예술가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이야기는 단순하게 이야기 되기는 힘든이야기이다. 오히려 단순 노동이 인간의 영역이 될지도 모른다.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추상적이고 복잡하게 만들어낸다면, 오히려 대다수의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단순 노동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는 은폐했던 진리가 드러날 것이다. 그 시기에는 철학이 존재할까는 미지수이다. 그것이 철학의 종결이자 과학의 종결인지도 모르겠다. 그 때가 도래할 때 까지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사고는 이미 고대에 종식된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문화적인 변주만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의 쓰임이라는게 미네르바의 올빼미로 비유한 헤겔의 말 처럼말이다. 역사의 부름에 걸맞는 철학이 필요한 것은, 문화의 양태가 다르기 때문이지 없던 철학 체계의 새로운 발견은 아닐거라는 얘기다. 오히려 과거 철학의 재발견이 필요할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은 과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로지 간명하게만 글을 쓰고 싶다면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꼴이 아닌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반대로 복잡하게만 쓰고 싶다면 자신의 고지식함을 증명하는 꼴이 아닌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기에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쓰라는 글은 넘쳐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인지는 명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뭐든 요즘은 지나치게 분석하면 까기 시작한다. 니체가 말하듯이 진리를 대하는 것은 그런 식의 진지함으론 도달 할 수 없다는 조소가 들려온다. 그러나 애초에 진지해 본 적이라곤 없는자들의 조소인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냉소하기란 그렇기에 힘든 법이다. 대상에 대해 진지해져 본 적이 있는 자들의 조소는 칼과 같다. 그것은 대상을 깔끔하게 죽일 수 있다. 살불살조(殺佛殺祖)가 온전히 가능하다. 그러나 한 측면이 비어버린 어설픈 조소라는 것은 대상에 삼켜진 것이지, 그것을 냉소하는게 아니다. 시니컬하기란 쉽지 않다. 대상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니체의 위험함은 그런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아, 아직도 그런 구닥다리 생각에 잠겨 계시군요."에서 진심이란 타인에게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오로지 불안하지 않음으로만 드러난다. 이것을 어설프게 썼다가는 자신의 불안함을 타인에게 쉽게 내비치게 된다. 타인은 그것을 보고, 뭐 열등감이나 불만이겠거니 치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냉소라는 것은 동일한 말을 쓸지라도 불안하지 않기에 타인에게 부끄러움을 심어준다. 내가 진심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건지를 타인에게 입력시키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태양을 가리는 황제 앞에서 방해하지 말고 꺼지라는 디오게네스의 말은 부처의 경지이다. 사고의 원류를 파악하는 방법이란 이런 식인지도 모르겠다.